시인ㆍ칼럼니스트
시인ㆍ칼럼니스트

여름 내내 대지를 뜨겁게 달구던 무더위의 기세도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제법 선선한 바람에 한 풀 꺾인 느낌이다. 더위가 물러간다는 처서(處暑)도 지났으니 이제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 셈이다. 한국세시풍속사전에 따르면, 처서는 24절기 중 열네 번째에 해당하는 절기로 입추(立秋)와 백로(白露) 사이에 든다고 되어 있다. 여름이 지나면 더위도 가시고 신선한 가을을 맞이하게 된다는 의미로, 더위가 그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음력 7월을 가리키는 중기(中期)이기도 하다.
 
처서가 지나면 따가운 햇볕이 누그러져 풀이 더 이상 자라지 않기 때문에 논두렁의 풀을 깎거나 산소를 찾아 벌초한다. 예전의 선비들은 여름 동안 장마에 젖은 책을 음지(陰地)에 말리는 음건(陰乾)이나 햇볕에 말리는 포쇄[曝曬]를 이 무렵에 했다. 독서의 계절을 맞이하기 위한 선견(先見)이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계절이 계절이니 만큼 ‘독서의 즐거움과 유익함’을 다시금 강조해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우선 ‘책읽기’는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어서라느니, 살기 바빠서라느니 하는 말은 한갓 핑계로 묻힌다. 
 
우리의 선현들은 난세일수록 책읽기를 더욱 즐겨하고 열심히 했다. 그분들이라고 해서 시간이 넘쳐나고 물질적으로 풍족해서 책을 즐겨 읽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국이 어지러울수록, 삶이 고단할수록 책 속에서 올바른 길을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독서삼매경에 빠져 난세의 시름을 한때나마 잊으려 했던 것이다. 독서는 곧 호연지기와 학문 연마라는 풍류정신의 한 면모이기도 했다.
 
그러나 IT 혁명(?)의 영향 탓인지 요즘, 특히 젊은이들이 갈수록 ‘책읽기’를 멀리하고 있으니 큰 걱정이 앞선다. 책 속에 길이 있고 독서가 곧 국력이란 말은 이미 옛말이 돼버린 듯하다. 특히 국가의 미래를 짊어질 초등학생들의 독서율 마저 갈수록 떨어지고 있으니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국민 독서 실태 조사에서 초등학생들은 쉬는 시간에 하는 일로 TV 보기와 컴퓨터 게임에 이어 셋째로 독서를 꼽았다. 
 
아시아계 여성으로 첫 하버드대 법대 종신교수로 임명돼 화제가 된 바 있는 석지영(미국명 Jeannie Suk) 씨는 “영어 한 마디도 못하던 내가 오늘날 이 자리에 선 것은 책을 통해 내 갈 길을 스스로 깨닫게 해준 엄마의 힘이었다”고 말했다. 
 
예일, 옥스퍼드, 하버드 등 세계 유수의 대학을 나온 그녀가 6살 때 미국에 이민 갔을 그 무렵엔 갑자기 바뀐 문화와 언어 환경에 적응하느라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엄마에게서 책을 찾는 방법을 배워 스스로 책을 찾아보고 깨닫는 즐거움을 누렸고, 자유를 추구하는 힘을 키웠던 것 같다고 했다.  
 
책을 많이 읽은 덕분에 그녀의 연구 분야는 다른 법학자와는 다른 융합적인 길로 가고 있다. 어릴 때부터 많은 것을 보고 상상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하는 그녀는, 학생들에게 미래의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간절한 영감을 불어넣는 교수가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미국의 오바마 전 대통령도 책을 많이 읽는 사람으로 알려진 바 있다. 그는 다양한 분야의 독서를 통해 사람들을 설득하고 영감을 불어넣는 언어의 리더십을 학습했다. 흑인도, 백인도 아닌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을 고민하던 청소년 시절, 그는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을 고발하는 랭스턴 휴즈, 제임스 볼드윈, 랠프 앨리슨, 리처드 라이트 등의 흑인작가들 작품에서 위안과 성찰을 얻었다고 한다. 
 
21세기는 창의와 감성이 주도하는 소프트 파워시대로, 상상력과 창의성에 바탕을 둔 창의산업이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게 되는데, 그 창의력과 상상력은 바로 독서에서 출발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독서는 단순 정서함양이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여가생활의 범위를 넘어 개인뿐만 아니라 한 국가의 경쟁력을 평가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고 있다.
 
가을의 문턱에서 어느 유명 드라마 작가가 들려 준 짧은 한 마디가 가슴 깊이 와 닿는다.  “인생에는 마법 같은 순간이 온다. 그때 준비된 사람은 자기 인생을 마법으로 바꿀 수 있는 것 같다”

저작권자 © 애플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