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는 성북동길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김광섭 ‘성북동 비둘기’ 전문
성북동 비둘기공원에는 이제 비둘기가 날아오지 않는다.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끝내 가슴에 금이 간 채 어디론가 떠나버린 것일까. 그래도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 시판(詩板)은 성북동 산동네와 성북동 하늘을 아스라이 비추어내고, 그 하늘로 시나브로 가을이 오고 있다. 성 밖 북쪽 마을이래서 어딘지 수월하게 생각해버릴지 모르지만, 성북동은 생각 밖으로 깊은 유서와,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자못 그윽한 사연과 인연을 간직하고 있다. 최순우옛집과 간송미술관이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오랜 인연을 이어가고 있고, 수연산방과 심우장은 한 시대를 되돌아보게 한다. 또 성북동 골짜기의 길상사는 법정 스님과 길상화 공덕주의 사연이 애틋하다. 여름의 끝자락,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고즈넉이 성북동길을 간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펴내 답사객들의 안목을 한 단계 높여준 혜곡 최순우(1916-1984)는 평생 박물관인으로 살며 우리 문화의 소중함을 아는 이들과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그래서 그가 살던 성북동 옛집은 성북동 답사의 출발점이 된다. 1930년대 초 지어진 근대 한옥으로, 1976년 이곳으로 이사 온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던 혜곡의 안목이 담긴 아름다운 집이다. 밀화빛 장판, 정갈한 목가구와 백자로 방치레를 하고, 마당에는 소나무, 산사나무, 모란, 수련 등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나무와 꽃을 가꾸었다. 이 집이 특히 사랑스러운 것은 2002년 시민들의 힘으로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으로 복원된 첫 시민문화유산이라는 점이다. 혜곡이 세상을 뜬 후 가족들이 살며 덧대어 쓴 공간을 덜어내고 낡은 곳을 보수하여 2004년 일반에 개방하였다.
‘한국적’이란 말은 한국 사람들의 성정과 생활양식에서 우러난 무리하지 않는 아름다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 소박한 아름다움, 호젓한 아름다움, 그리움이 깃들인 아름다움, 수다스럽지 않은 아름다움 그리고 이러한 아름다움 속을 고요히 누비고 지나가는 익살의 아름다움 같은 것을 아울러서 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최순우 <낱낱으로 보는 한국미> 중에서
얼마 전 경주 포석정 근처에서 이끼 낀 화강암 조각을 사다가 놓은 것이 있는데, 간송께서 와 보시곤 자꾸 달라고 하세요. 어느 사이엔가 없어졌는데, 하루는 간송이 집에 오라고 하시고는 간송이 가지신 돌조각과 내 돌조각을 맞추어 보여주시며 ‘이렇게 딱 맞는 같은 조각인데 이래도 안 줄 테야’하시더군요. 기연이지요. -최순우 <간송의 생애와 예술> 중에서
간송미술관은 최순우옛집에서 그리 멀지 않다. 간송 전형필 선생(1906-1962)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포함한 수많은 문화재를 지켜낸 민족문화 수호자이며, 1938년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 보화각(지금의 간송미술관)을 건립한 선각자이기도 하다. 1950년 국보특별전람회에서 처음 만난 간송과 혜곡은 한국전쟁 동안 민족문화재를 지켜내는 데 함께하며 깊은 정을 나눈다. 본명이 ‘희순’인 혜곡에게 ‘순우’라는 필명을 지어준 것도 간송이었다. <훈민정음 해례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겸재 정선과 김홍도, 신윤복의 그림 등 우리나라의 중요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간송미술관은 현재 보존공사를 위해 휴관중이며, 소장품들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간송미술관은 휴관 전에도 1년 중 봄, 가을 2주간씩만 오픈하기 때문에 접근이 쉽지 않은 곳이기는 했다.
간송미술관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수연산방(壽硯山房)이 나온다. 당대의 문장가였던 상허 이태준(1904-?)이 살던 집이다. 강원도 철원 출신인 상허는 1930년대부터 이곳에서 살면서 글을 썼고, <달밤> <돌다리> 등 주옥같은 단편집과 <문장강화> 등의 저서를 남겼다. 1946년 월북하는 바람에 한동안 우리에게 ‘이O준’ 등 제한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었던 이름이기도 했지만, 한국전쟁이 끝난 뒤 북에서도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시에는 정지용, 문장에는 이태준'이라 일컬어질 만큼 최고의 문장가였던 그의 글에 대해서는 ‘군더더기 없는 문장의 전형’(이오덕 <우리문장 바로쓰기>)이라는 등의 칭송이 따라붙는다. 특히 지금도 팔리고 있는 <문장강화>는 오래 전 나온 책이나, 글을 쓰고자 하는 이에게는 아직 이만한 책이 없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수연산방은 현재 그의 외종손녀에 의해서 한옥카페로 사용되고 있다.
뒷산은 처음에는 산대로여서 우리는 올려다보는 풍치가 그럴 듯했는데 올 여름에는 산 임자가 와서 바로 우리 마당에서 뻔히 쳐다보이게 집을 난짝 올려앉혔다. 그리고 우리 집을 그냥 내려다보면서 두부장수를 부르고 고기장수를 부른다. 키 큰 사람이 내 키 너머로 남과 이야기할 때의 불쾌감이 그대로 나는 것이다. 어서 키 큰 상록수를 사다 뒤를 둘러막고 뒤를 많이 보게 하였던 마당 차림을 인제부터는 앞을 많이 보는 마당으로 고쳐야겠다. -이태준 <옆집 ‘냄새’ 업(業)> 중에서
신상위험은 고사하고 조금만 이(利)하면 양심에 부끄럼도 모르고 짐승의 짓도 하지마는 나는 정의가 생명이라 위험을 겁내지 않고 못할 짓은 죽어도 못한다. -김관호 <심우장 견문기> 중에서
심우장(尋牛莊) 가는 길은 가파르고, 그 집은 북녘을 향해 있어 양지바르지도 않다. 만해 한용운(1879-1944)은 남쪽 조선총독부의 꼴을 마주하기 싫어 집조차 북향으로 지었다. 성북동 비탈길의 심우장은 만해의 얼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곳이다. 일제에 저항하는 삶을 일관했던 만해는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4년 이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심우장’이란 명칭은 선종의 ‘깨달음’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자기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뜻에서 유래한 것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장방형 평면에 팔작지붕을 올린 민도리 소로수장집으로, 만해가 쓰던 방에는 그의 글씨, 연구논문집, 옥중공판기록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만해가 죽은 뒤에도 외동딸 한영숙이 살았는데 일본대사관저가 이곳 건너편에 자리 잡자 명륜동으로 이사를 하고, 심우장은 만해사상연구소로 사용하였다.
심우장 문을 되돌아 나오다가 골목길에서 난데없는 경고에 가까운 알림판 하나를 만난다.
위로 조금만 올라오시면 성곽과 마을이 아름다운 북정마을과 북정미술관이 있습니다. 안 보고 가시면 평생 후회하실 것입니다. -북정마을 주민일동
북정마을은 성북동 비탈길 끄트머리에서 서울성곽과 이어지는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로 일컬어지는 마을이다. 시 ‘성북동 비둘기’의 모델이 된 마을로 알려져 마을 바로 아래 앞에서 소개한 비둘기공원이 들어서 있기도 하다. 마을로 올라서면 ‘평생 후회’까지는 아니더라도 놓치기 아까운 멋진 풍광이 펼쳐진다. 눈앞으로 성북동 산동네와 북악스카이웨이의 능선이 한눈에 펼쳐지는-. ‘북정마을’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궁중에 바치는 메주를 만드는 일이 마을에 주어지면서 온 마을 사람들이 메주 만드는 일로 북적대서라고도 하고, 한양도성의 북쪽 우물이 있는 마을이라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어쨌든 이 마을은 그 조망만으로도 ‘심우장 가는 길’의 하이라이트가 된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아까 알림판의 실상(‘주민일동’을 내세운) 주인인 북정미술관(‘아마도 서울에서 가장 높은 갤러리’였다는)이 얼마 전 문을 닫았다는 사실이다.
성북동 ‘삼각산 길상사’는 1997년에 세워졌으므로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최고급 요정이었던 ‘대원각(大苑閣)’이 불교 사찰로 탈바꿈한 특이한 설립 이력으로 유명한 곳이다. 공덕주 김영한(1916-1999)은 가난 때문에 팔려가다시피 만난 남편과 사별한 후 기생이 되었다. 기명은 진향(眞香). 이후 시인 백석(1912-1996)과 사랑에 빠졌으나 신분 때문에 남자 측 집에서 결혼을 반대하여 끝내 맺어지지 못했다. 백석은 그녀에게 이백의 시에 나오는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붙여주었고, 그의 시에 등장하는 '나타샤'의 모델이 바로 그녀이기도 하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탸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중에서
백석과 이별한 그녀는 성북동 기슭에 요정인 대원각을 차려 크게 성공했다. 그러나 백석과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은 항상 마음에 담아둔 채 홀로 지냈다. 그러던 중 법정(1932-2010)의 <무소유>를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아 1987년 스님에게 요정 터 7,000여 평과 40여 채의 건물(당시 시가로도 1,000억 원이 넘는 액수였다고)을 시주하면서 절을 세워달라고 간청했다. 법정은 처음에는 극구 사양했으나 결국 이를 받아들여 1997년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의 말사로 등록하여 길상사를 세웠고, 이때 그녀는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았다.
길상사는 본래 요정이었기 때문에 절의 풍경부터 다른 전통적인 사찰과는 사뭇 다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불교 신자가 아닌 사람이 산책하면서 마음을 다스리기에는 오히려 편안한 구석도 있다. 군사정권 시절 요정정치가 벌어지던 밀실이 지금은 누구나 참선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개방되어 있다. 언뜻 성모마리아를 닮은 관세음보살상은 법정이 종교 간 화합을 염원하는 마음에서 천주교 신자인 조각가 최종태에게 의뢰하여 봉안하면서 이 절의 명물이 되었다. 사찰 설립식 행사 때 김수환 추기경이 직접 절을 방문해 축사를 한 적이 있고, 법정은 이에 대한 답례로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성당을 방문하기도 했다. 가을이면 절마당에 심어진 꽃무릇이 아름답게 피어난다. 흔히 ‘상사화(相思花)’로 불리는 꽃무릇이 빼곡히 피어난 풍경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성북구에서는 오는 9월 20일부터 22일까지 ‘성북동 문화재야행-성 밖 마을 사람들’을 성북동 일원에서 실시한다. 이 기간 성북동을 대표하는 심우장, 이종석별장, 최순우옛집,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원 등의 문화재와 선잠박물관, 우리옛돌박물관, 가구박물관 등의 문화시설들이 야간에 개방된다. 또한 성북동의 선잠문화 체험 및 미니베틀 체험과 정통 복식인 배씨댕기 만들기, 사군자 부채 그리기 등의 체험 프로그램, 성북동의 아트셀러들과 함께하는 아트마켓, 민요, 대금 독주, 비올라 앙상블, 락밴드 등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만날 수 있다.
여행작가 유성문은 길에서 길의 내력을 들춰왔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새겨왔다. 그 내력과 사연은 먼빛이 되어 다시 그를 길로 내세운다. ‘길에서 길을 묻다’(경향신문), ‘사람의 길’(주간경향) 등 오랫동안 길과 사람 이야기를 써왔다. 문학관기행 <문향을 따라가다>(어문각)를 펴내기도 했다.
서울 본토배기 지인들에게 믈어봐도 알 수가 없다고 하데...
어려서 기억으로는 채석장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숲이 우거져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답변이야...
만해 선사의 심우정은 이야기만 들었지 가 보질 못하고 있지..
최순우 선생의 "무량수전..."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고.. 한 시절 미술이론가론서 명성을 날리신 분이니.
이태준 이야기는 처음 듣네... 성북동에서 사셨고만..
백석과 기생인 대원각 여주인 그리고 법정 스님과 길상사 이야기는 신문보도로 알고 있고..
이런 문화와 역사를 알려 주는 살아 있는 서울로드길을 쓰는 유성문 작가의 노고에 감사함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