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
비 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
  • 유성문(먼빛)
  • 승인 2019.09.14 20:14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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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봉 옌볜거리와 구로아리랑

그 시절, 누구인들 공장 다니는 누이 하나 없었을까. 명절이면, 그 누이들이 들고 올 선물 보따리를 잔뜩 기대했다가도, 막상 종합선물세트 하나라도 받아들 때면 민망하다 못해 서러웠던, 그런 기억 하나 없을까. 그 누이들로, 그 누이들을 낳은 어머니들로 대한민국은 이만큼 성장했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은 오늘도 여전히, 어엿하게 가난을 벗어나진 못했다. 공선옥의 말마따나 ‘이제 우리 모두 가난한 게 아니고, 각자가 가난할(<공선옥, 마흔에 길을 나서다>)’ 뿐. 그리고 예전 소위 ‘공순이’라 불리던 우리 누이들이 득시글하던 구로공단과 가리봉동 거리는 어느덧 옌볜들이 대를 잇고 있을 뿐.

하필이면, 마침, 공교롭게도, 가리봉동을 찾던 날, 비가 내렸다. 조금씩. 왜 소설가 양귀자는 ‘비 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고 하고, 시인 유하는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고 했을까. 어쩌면 가리봉동과 압구정동은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일지도 모른다. ‘가난한 사람들의 기착지’와 ‘부자들의 종착지’로서. 기실 양귀자의 소설 ‘비 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는 가리봉동이 무대가 아니다. 연작소설집 <원미동 사람들>의 한 편으로 쓰여진 ‘비 오는…’은 원미동에서 막노동으로 어렵게 살아가는 임씨가 비가 와서 공치는 날이면 돈 떼먹고 도망간 사업주를 찾아 가리봉동에라도 가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구로디지털단지역 앞의 ‘깔깔거리’는 어디나 흔한 음식특화거리 하나를 더 만들면서 ‘깔끔하게 차리고, 깔끔하게 먹는다’ 해서 붙인 이름이라지만, 그 어감이 주는 감상은 왠지 속 빈 강정처럼 허전하기만 하다. 지금 그 거리의 풍경처럼. 잘 모르겠다. 거리마다 이런 조악한 이름을 급조하여 붙이고, 그래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득시글해지고, 얼마간 지나면 또 다시 다른 급조 거리로 몰려가야 하는 이유를.
구로디지털단지역 앞의 ‘깔깔거리’는 어디나 흔한 음식특화거리 하나를 더 만들면서 ‘깔끔하게 차리고, 깔끔하게 먹는다’ 해서 붙인 이름이라지만, 그 어감이 주는 감상은 왠지 속 빈 강정처럼 허전하기만 하다. 지금 그 거리의 풍경처럼. 잘 모르겠다. 거리마다 이런 조악한 이름을 급조하여 붙이고, 그래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득시글해지고, 얼마간 지나면 또 다시 다른 급조 거리로 몰려가야 하는 이유를.

어쨌거나 비는 오지만 바람은 불지 않는 날, 가리봉동을 가기 위해서 구로디지털단지역(옛 구로공단역)에서 내린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구로공단과 가리봉동은 한 몸통이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구로공단으로 몰려들었던 우리의 누이들은 가리봉동의 다닥다닥한 쪽방에 고단한 몸을 뉘였다. 하지만 그 시절을 짐짓 모르는 체 구로동이나 가리봉동이나 ‘디지털’이란 번지르르한 이름으로 바꿔달고 고층밀집지역으로 탈바꿈해가고 있다. 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슴속 깊이 남아있는 한 시절의 기억마저도 다 바꿔낼 수 있을까. 그 기억 속에서 코끝이 알싸해지는 그리움과 추억마저도 다 비워낼 수 있을까.

왼쪽/지금은 ‘G밸리’라 불리는 구로공단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수출의 여인상’은 한동안 외진 곳에 내몰렸다가 겨우 제 자리를 찾았다. 1974년 한국수출산업공단 창립 1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지만 20층짜리 비즈니스센터 건립과정에서 화단 구석으로 밀려나 있다가 2014년 공단 창립 50주년을 맞아 다시 제자리인 현 한국수출산업단지공단(KICOX) 앞으로 돌아온 것이다. ‘수출의 여인’은 한 손에는 횃불을, 한 손에는 지구본을 들고 있다. ‘전 산업의 수출화’라는 동상 현판은 개발독재 시절의 위력을 느끼게 한다. 그런 기치 아래 얼마나 많은 우리 누이들이 땀과 눈물을 흘려야 했을까. 그 때문에 지금의 ‘수출강국’이 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오른쪽/‘G밸리’의 에이스테크노타워 2차 건물은 원래 삼성보다 먼저 TV를 만들었던 동남전기가 있었던 자리로, 신경숙의 소설 ‘외딴방’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작가는 열여섯 어린 나이에 낮에는 동남전기에서 여공으로 일하고, 밤에는 산업체 특별학교인 영등포여고에서 공부했다. 열여섯 살부터 스무 살까지 자신이 겪은 구로공단에서의 삶은 ‘외딴방’에 고스란히 재현되어 있다.
왼쪽/지금은 ‘G밸리’라 불리는 구로공단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수출의 여인상’은 한동안 외진 곳에 내몰렸다가 겨우 제 자리를 찾았다. 1974년 한국수출산업공단 창립 1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지만 20층짜리 비즈니스센터 건립과정에서 화단 구석으로 밀려나 있다가 2014년 공단 창립 50주년을 맞아 다시 제자리인 현 한국수출산업단지공단(KICOX) 앞으로 돌아온 것이다. ‘수출의 여인’은 한 손에는 횃불을, 한 손에는 지구본을 들고 있다. ‘전 산업의 수출화’라는 동상 현판은 개발독재 시절의 위력을 느끼게 한다. 그런 기치 아래 얼마나 많은 우리 누이들이 땀과 눈물을 흘려야 했을까. 그 때문에 지금의 ‘수출강국’이 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오른쪽/‘G밸리’의 에이스테크노타워 2차 건물은 원래 삼성보다 먼저 TV를 만들었던 동남전기가 있었던 자리로, 신경숙의 소설 ‘외딴방’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작가는 열여섯 어린 나이에 낮에는 동남전기에서 여공으로 일하고, 밤에는 산업체 특별학교인 영등포여고에서 공부했다. 열여섯 살부터 스무 살까지 자신이 겪은 구로공단에서의 삶은 ‘외딴방’에 고스란히 재현되어 있다.

가리봉시장에 밤이 깊으면/ 가게마다 내걸어 놓은 백열전등 불빛 아래/ 오가는 사람들의 상기된 얼굴마다/ 따스한 열기가 오른다 (…) 돈이 생기면 제일 먼저 가리봉시장을 찾아/ 친한 친구랑 떡볶이 500원어치, 김밥 한 접시/ 기분나면 살짜기 생맥주 한 잔이면/ 스테이크 잡수시는 사장님 배만큼 든든하고 (…) 피가 마르게 온 정성으로 만든 제품을/ 화려한 백화점으로,/ 물 건너 코 큰 나라로 보내고 난/ 허기지고 지친/ 우리 공돌이 공순이들이/ 싸구려 상품을 샘나게 찍어 두며/ 300원어치 순대 한 접시로 허기를 달래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구경만 하다가/ 허탈하게 귀가길로/ 발길을 돌린다 –박노해 ‘가리봉시장’ 중에서

가리봉시장은 이제 옌볜인의 차지가 되었다. 역시 구로공단에서 노동자 생활을 했던 박노해 시인이 친구들과 먹던 떡볶이니 김밥이니 생맥주는 이제 양꼬치니 월병이니 이과두주로 바뀌었다. 그렇다고 그 속내까지 바뀐 건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가난한 그들은 서로 기대고 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아득바득 버틸 수 있게 해주는 대부분의 힘은 고향에의 그리움에서 나온다. 그 지지리도 못난 고향은 서럽고 아득할 때마다 마치 먼 신기루처럼 따뜻하고 아름답게 다가온다. 가리봉동의 조선족들은 한국에서, 한국사람인 듯 아닌 듯 살아가지만 그들의 고향은 이미 마음속에 있다. 그렇지만 너무 멀다.

가리봉시장 일대의 우마로는 명절이면, 명절이어도 고향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다. 한글로 된 간판만 떼어버린다면 여기가 한국인지 중국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가리봉시장 일대의 우마로는 명절이면, 명절이어도 고향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다. 한글로 된 간판만 떼어버린다면 여기가 한국인지 중국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지금은 디지털단지오거리로 이름이 바뀐 가리봉오거리는 가산동으로 편입된 지역을 포함하여 가리봉지역의 중심과도 같은 곳이다. ‘가리봉’이란 이름이 ‘골’ 또는 갈라졌다는 뜻의 ‘가리’에서 비롯했다는 유래에 따른다면 이곳에서 동서남북으로 갈래지어 뻗어나가고 있는 셈이다. 유독 수해가 잦고 습한 지역이라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사는 동네"였던 가리봉동은 1960년대 들어 크게 모습이 바뀐다. 박정희정권의 시작과 함께 6.25전쟁 이후 난립되어 있던 서울 도심지역의 판잣집을 정리하고, 구로동과 가리봉동 등 외곽에 공영주택과 간이주택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이주시켰다. 이때 구로공단이 조성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된다.

지금의 디지털단지오거리, 옛 가리봉오거리는 고고장, 음악다방, 시위대 세 가지로 유명했던 곳이다. 고고장이 많을 때는 9개나 있었을 정도로 유흥의 거리였지만,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이 함께 이 땅의 모순상황과 맞섰던 노학연대의 장이기도 했다. 디지털단지오거리 인도 바닥에는 ‘구로동맹파업 현장’이라는 동그란 동판이 설치되어 있다.
지금의 디지털단지오거리, 옛 가리봉오거리는 고고장, 음악다방, 시위대 세 가지로 유명했던 곳이다. 고고장이 많을 때는 9개나 있었을 정도로 유흥의 거리였지만,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이 함께 이 땅의 모순상황과 맞섰던 노학연대의 장이기도 했다. 디지털단지오거리 인도 바닥에는 ‘구로동맹파업 현장’이라는 동그란 동판이 설치되어 있다.

디지털단지오거리를 지나면 가산로데오거리이고, 현재 대형쇼핑몰 현대시티아울렛이 자리 잡은 곳은 1985년 6월 구로동맹파업의 불씨를 지핀 대우어패럴이 있던 자리다. 당시 임금인상투쟁을 벌인 대우어패럴 노동조합 간부를 경찰이 구속하자 이에 항의하는 노동자들이 연대파업을 벌였다. 대우어패럴,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부흥사 등 7개 노조가 함께 공동 대응하며 모임을 갖고 소식지도 발간했다. 43명이 구속되고 1,200여 명이 해고당한 구로동맹파업은 대한민국 노동운동의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다. 이후 소설가 이문열은 구로동맹파업을 배경으로 ‘구로아리랑’을 발표했고, 이 소설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가산로데오거리는 과거 구로공단의 핵심지역으로서, 구로공단 지역 내에 위치한 의류회사들이 이 지역에 자사 상설할인점을 내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후 섬유 및 의류 공장들이 원가가 싼 동남아 및 타 지역으로 이전하면서 생긴 빈자리에 복합 상설할인점 및 더 많은 상설 로드매장들이 들어서 국내 4대 패션밸리 중 하나로 지정되는 등 그 규모가 확장되었다. 그 중심에 있는 현대시티아울렛은 구로동맹파업의 불씨를 지핀 대우어패럴 있던 곳으로, 이곳에서 디지털2단지 사거리 건너 3단지로 이어지는 이른바 ‘수출의 다리’가 바라보인다.
가산로데오거리는 과거 구로공단의 핵심지역으로서, 구로공단 지역 내에 위치한 의류회사들이 이 지역에 자사 상설할인점을 내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후 섬유 및 의류 공장들이 원가가 싼 동남아 및 타 지역으로 이전하면서 생긴 빈자리에 복합 상설할인점 및 더 많은 상설 로드매장들이 들어서 국내 4대 패션밸리 중 하나로 지정되는 등 그 규모가 확장되었다. 그 중심에 있는 현대시티아울렛은 구로동맹파업의 불씨를 지핀 대우어패럴 있던 곳으로, 이곳에서 디지털2단지 사거리 건너 3단지로 이어지는 이른바 ‘수출의 다리’가 바라보인다.

돌아오는 길은 가산디지털단지역을 택한다. 가산디지털단지역은 1968년 제1회 한국무역박람회 개최를 위해 ‘가리봉역’이란 이름으로 조성되었다. 이후 1974년에 1호선이 개통되면서 서울의 전철사와 함께 변화해왔다. 가산디지털단지역 가까이에는 ‘순이의 집’이 있다. 2013년 금천구에서 조성한 ‘구로공단노동자생활체험관’이다. 구로공단의 역사와 여성노동자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전시체험공간으로, 1층에는 그 시대 생활상이 담긴 ‘가리봉상회’, 지하층에는 여공들이 살았던 쪽방의 모습을 복원해 놓았다. 그 시절 우리 누이 ‘순이’는 ‘벌집’이라 불린 쪽방에서 살며 저임금노동에 시달렸지만 그 웃음만은 해맑다. 누구인들 다들 어려웠지만 외려 따뜻했던 그 시절이 그립지 않을까.

서른일곱 개의 방이 있던 그 집, 미로 속에 놓인 방들, 계단을 타고 구불구불 들어가 이젠 더 어쩔 수 없을 것 같은 곳에 작은 부엌이 딸린 방이 또 있던 3층 붉은 벽돌집 (…) 서른일곱 개 방 중의 하나, 우리들의 외딴방. 그토록 많은 방을 가진 집들이 앞뒤로 서 있었건만, 창문만 열면 전철역에서 셀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게 보였다. -신경숙 ‘외딴방’ 중에서

구로공단노동자생활체험관에는 ‘벌집’과 ‘닭장집’이라 불린 쪽방에서 2~3명의 10대 여성들이 쪽잠을 청해야 했던 당시의 생활상이 지하 1층과 지상 2층 건물에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한 평도 안 되는 쪽방 부엌에는 연탄아궁이와 석유곤로, 그리고 방안에는 철제 프레임에 비닐을 씌운 ‘비키니장’이 놓여있고, 소녀들의 우상이었던 청춘스타의 사진들이 벽에 붙어있다.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던 공동세면장의 모습도 보인다. 보증금 20만원에 월세 3만~4만원이었던 방세를 분담하기 위해 2~3명이 한 방에서 생활해야 했던 우리 누이들의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지켜보는 듯하다.
구로공단노동자생활체험관에는 ‘벌집’과 ‘닭장집’이라 불린 쪽방에서 2~3명의 10대 여성들이 쪽잠을 청해야 했던 당시의 생활상이 지하 1층과 지상 2층 건물에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한 평도 안 되는 쪽방 부엌에는 연탄아궁이와 석유곤로, 그리고 방안에는 철제 프레임에 비닐을 씌운 ‘비키니장’이 놓여있고, 소녀들의 우상이었던 청춘스타의 사진들이 벽에 붙어있다.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던 공동세면장의 모습도 보인다. 보증금 20만원에 월세 3만~4만원이었던 방세를 분담하기 위해 2~3명이 한 방에서 생활해야 했던 우리 누이들의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지켜보는 듯하다.

여행작가 유성문은 길에서 길의 내력을 들춰왔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새겨왔다. 그 내력과 사연은 먼빛이 되어 다시 그를 길로 내세운다. ‘길에서 길을 묻다’(경향신문), ‘사람의 길’(주간경향) 등 오랫동안 길과 사람 이야기를 써왔다. 문학관기행 <문향을 따라가다>(어문각)를 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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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강지서(위영) 2019-09-19 10:28:41
나는 사실 구로나 가리봉동과 오류동 일대를 모른다. 서울 살면서고 가 본 적이 없다. 요즈음 업무차 IT산업들이 다소 있는 구로 디지털역(가리봉동)에 가 보곤 했는데 유성문 작가의 글을 읽으며 조금은 이해가 되어 고맙다.

우리의 큰 누나나 고모나 이모들에 해당되는 공순이 언니들이 큰 희생으로 동생들이 성장하고 발전하고 교육혜택을 받았다.

문제는 그들의 희생에 대한 댓가가 없다는 것이다. 집안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내가 아는 한 지인도 홀로 살며 남동생들을 부모를 대신해 모두 대학을 보내 놨더니 결혼하며 변해서 희생하며 키워준 누나를 뒤돌아 보지 않는다. 이것이 대부분 공순이 누나들의 처한 현실일 것이다.

과연 무엇이 행복하고 질나은 삶일까? 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 유작가의 가리봉동 로드길이다.

이혜숙 2019-09-15 22:48:14
로드서울을 읽으니 제가 아는 구로동이 아나로그에서 디지털화 된거 같네요. 삶의 질이 높아진거 같은데 씁쓸함이 남는건 왜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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