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 아리랑고개와 미아리고개

서울과 서울 근처의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산은 단연 북한산이다. 이는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산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월간 <산>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2018년 한 해 동안 북한산 방문객 수는 총 551만여 명으로, 2위인 지리산 330만여 명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수도권 2,000만 인구를 배후로 하고 있는 만큼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가장 ‘많이’와 가장 ‘좋아하는’과는 또 차이가 있어, ‘좋아하는 산’ 순위에서 북한산은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에 이어 4위로까지 밀리고야 만다. 
주말이면 병목구간에서 앞사람 엉덩이만 보며 올라야 할 지경이면서도 그나마 4위라도 차지하고 있는 까닭은 순전히 선호도보다는 거리적 이점 때문일 게다. 그렇다고 북한산은 그저 ‘가까운’ 산쯤으로 여길만한 산은 결코 아니다. 북한산은 어엿한 서울의 진산(鎭山)이며, ‘삼각산’이란 별칭이 보여주듯 우리 민족의 역사와 애환이 담긴 산이다. 그래서 북한산 산그늘 아래 정릉지역 기행의 첫걸음은 북한산탐방안내소가 있는 청수장에서 시작한다. 이왕 서둘렀다면 보국문이나, 더 나아가 대성문쯤 가벼운 북한산 산행 이후이어도 좋고.

북한산의 여명. 산이 저만치 있을 때는 그저 산일 뿐이지만 사람들의 삶에 산이 끼어들면 산은 신화가 되고 역사가 된다. '북한산'이란 이름은 조선 후기에 한수(한강) 이북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별칭인 '삼각산'은 백운대, 인수봉, 만경봉의 세 봉우리로 이루어진다 해서 불리게 된 이름으로, 김상헌의 시조 '가노라 삼각산아'에 나오는 바로 그 산이다.
북한산의 여명. 산이 저만치 있을 때는 그저 산일 뿐이지만 사람들의 삶에 산이 끼어들면 산은 신화가 되고 역사가 된다. '북한산'이란 이름은 조선 후기에 한수(한강) 이북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별칭인 '삼각산'은 백운대, 인수봉, 만경봉의 세 봉우리로 이루어진다 해서 불리게 된 이름으로, 김상헌의 시조 '가노라 삼각산아'에 나오는 바로 그 산이다.

앞에서 ‘북한산탐방안내소가 있는 청수장’이라고 언급했지만 이는 잘못된 설명이다. 제대로 이야기하자면 옛 청수장 건물에 북한산탐방안내소가 들어선 것이다. 그럼에도 그리 말한 연유는 ‘청수장(淸水莊)’이 예전 이곳에 있었다는 여관 이름이기도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이 일대를 일컫는 지리적 명칭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정릉과 개포동을 오가는 143번 노선버스(뒤에 또 이야기하겠다) 종점 이름이 ‘청수장’이기도 했다. 그 유래가 어떠하든 적어도 이곳이 아직까지 청수골의 맑은 계류가 흘러 다니는 별장지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청수장은 우리나라가 일제에 병합되던 1910년 조선총독부 관리들의 휴양시설로 처음 조성되었다. 해방 이후 서울을 대표하는 요정으로, 사교장으로 이름을 날리던(1954년 발표된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에서 주인공이 외간남자와 춤을 추는 곳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청수장은 1974년부터 여관으로 바뀌어 운영되다가, 1983년 북한산이 15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탐방안내소로 탈바꿈했다. 현재는 디지털 액자와 VR 영상 등을 통해 북한산의 경관과 생태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자료관 역할을 하고 있다. 

북한산탐방안내소 앞을 흐르는 청수계곡. 북한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초기에는 이 일대가 ‘정릉유원지’로 불리며 계곡 인근 상인들의 불법 상행위로 신음했다. 300년 역사를 지닌 북한산성 마을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주민들이 오·폐수를 계곡에 무단으로 방류하고 음식점 셔틀버스를 운행하는 등 마찰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북한산국립공원은 마을을 이전키로 결정하고, 2002년부터 집단시설지구 철거와 함께 꾸준한 계곡정비사업을 벌임으로써 어느 정도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자연을 더럽히는 인간의 마음속에 청수가 흐를 리야 없다.
북한산탐방안내소 앞을 흐르는 청수계곡. 북한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초기에는 이 일대가 ‘정릉유원지’로 불리며 계곡 인근 상인들의 불법 상행위로 신음했다. 300년 역사를 지닌 북한산성 마을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주민들이 오·폐수를 계곡에 무단으로 방류하고 음식점 셔틀버스를 운행하는 등 마찰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북한산국립공원은 마을을 이전키로 결정하고, 2002년부터 집단시설지구 철거와 함께 꾸준한 계곡정비사업을 벌임으로써 어느 정도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자연을 더럽히는 인간의 마음속에 청수가 흐를 리야 없다.

“정릉이 누구 능이야?”
“정조? 정종? 정...약용?”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국민첫사랑’ 수지(서연 역)는 교수의 질문에 어물쩍 되도 않는 답을 내놓는다. 알고 보면 수지의 집은 정릉동이다.

“지금 자기가 사는 동네를 여행 다녀라. 평소 무심코 지나쳤던 건물, 길들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사진으로 남겨봐라.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한 애정을 갖고 시작하는 것이 바로 건축학개론이다.”

교수로부터 리포트 과제를 받아든 수지는 정릉 탐방에 나섰고, 거기서 역시 정릉동에 살고 있는 건축학도 첫사랑 이제훈(승민 역)을 발견한다. 그러고 보면 ‘로드 서울’이야말로 가장 성실한 건축학개론이다. 

너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볼 수만 있다면 
철없던 나의 모습이 얼마만큼 의미가 될 수 있는지 
많은 날이 지나고 나의 마음 지쳐갈 때 
내 마음속으로 스러져가는 너의 기억이 다시 찾아와 
생각이 나겠지 
너무 커버린 미래의 그 꿈들 속으로 
잊혀져가는 너의 기억이 다시 생각날까 
-영화 <건축학개론> OST ‘기억의 습작’ 중에서 

한때 북악 골짜기에 위치한 대학에 다녔던 관계로 나 역시 ‘꽃피는 정릉골’에 관한 사연이 어지간하지만 단지 ‘기억의 습작’으로만 간직하련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영화 속에서 승민과 서연이 정릉에서 처음 만난 후 이번에는 개포동으로 답사를 가면서 함께 탔던 버스가 바로 앞에서 이야기한 143번 버스다. ‘정릉산장아파트’에서 ‘개포중학교’ 구간을 오가는 이 버스는 왕복 62㎞에 정류장만 42개로, 정릉에서 서울 도심과 강남을 연결하는 거의 유일한 노선이라 그 수요가 상당해 지난해 수도권에서 이용객 수가 가장 많았던 버스 노선인 것으로 나타났다. 

왼쪽/‘꽃피는 정릉골’. 청수장 버스 종점 부근에는 산행 후 시원한 탁주 한잔 즐길 집들이 즐비하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이야기꽃을 피운다. 오른쪽/정릉동의 한 주택 대문에 걸린 꽃바구니. 항상 꽃 가까이 사는 사람이 꽃을 더욱 가까이하는 법이다. 그 꽃은 꽃을 마음에까지 두고자 하는 마음의 꽃이며, 늘 꽃피우기를 바라는 바람의 꽃이기도 하다.
왼쪽/‘꽃피는 정릉골’. 청수장 버스 종점 부근에는 산행 후 시원한 탁주 한잔 즐길 집들이 즐비하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이야기꽃을 피운다. 오른쪽/정릉동의 한 주택 대문에 걸린 꽃바구니. 항상 꽃 가까이 사는 사람이 꽃을 더욱 가까이하는 법이다. 그 꽃은 꽃을 마음에까지 두고자 하는 마음의 꽃이며, 늘 꽃피우기를 바라는 바람의 꽃이기도 하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 중 정릉만큼 곡절이 많은 능도 드물다. 정릉은 조선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1396)의 무덤이다. 둘째 부인인 만큼 첫째 부인 소생과의 골육상쟁은 어쩌면 필연적이었고, 이는 끝내 그녀 사후 피비린내 나는 ‘왕자의 난’으로 나타난다.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어렵게 왕위에 오른 태종은 생전 앙숙이었던 계모에 대한 처절한 응징에 나선다. 그것도 망자를 상대로. 조선 최초의 왕비였던 강씨를 후궁으로 강등시키고, 원래 정동에 있던 능도 도성 밖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묘로 격하시켜버렸다.
뿐만 아니라 서둘러 이장하면서 규모를 대폭 축소하고, 이때 남은 목재와 석재 일부를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숙소였던 태평관 건립에, 병풍석은 광통교 건설에 쓰이도록 했다. 심지어 종묘에도 배향하지 않는 등 망자에게 가할 수 있는 수모란 수모는 모조리 안겨주었다. 신덕왕후는 이후 260여 년이 지난 뒤인 현종 대에 이르러 비로소 왕비로 추존되어 종묘에 배향된다. 이때 정릉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일대에 많은 비가 쏟아졌다. 사람들은 이 비를 ‘세원지우(洗寃之雨, 원한을 씻어주는 비)’라고 불렀다.

정릉은 조선 건국 이후 최초로 조성된 능이지만 생각 밖으로 소박하다. 아무래도 정동에서 이장하면서 규모가 대폭 축소된 탓이 크지만, 그 능에 얽힌 사연 때문에 더 조촐하고 애틋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왼쪽/정릉의 홍살문과 키 큰 소나무.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서연과 승민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 곳이 바로 이 홍살문 앞이었다. 오른쪽/정릉의 정자각과 능침. 일반적으로 조선의 왕릉은 홍살문과 정자각, 능이 일직선상에 놓여있지만, 정릉은 특이하게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가 ‘ㄱ’자로 꺾여있다. 정릉에서는 매년 9월 23일 신덕왕후를 기리는 제사가 진행된다.
정릉은 조선 건국 이후 최초로 조성된 능이지만 생각 밖으로 소박하다. 아무래도 정동에서 이장하면서 규모가 대폭 축소된 탓이 크지만, 그 능에 얽힌 사연 때문에 더 조촐하고 애틋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왼쪽/정릉의 홍살문과 키 큰 소나무.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서연과 승민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 곳이 바로 이 홍살문 앞이었다. 오른쪽/정릉의 정자각과 능침. 일반적으로 조선의 왕릉은 홍살문과 정자각, 능이 일직선상에 놓여있지만, 정릉은 특이하게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참도가 ‘ㄱ’자로 꺾여있다. 정릉에서는 매년 9월 23일 신덕왕후를 기리는 제사가 진행된다.

원래는 아리랑고개를 넘어 능말(정릉동의 옛 이름)에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은 미아리고개를 넘어올 작정이었다. 그것이 고개를 넘어가고 넘어오는 어떤 마음을 따라가는 데 적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산의 산빛을 잠시라도 가까이 둘 요량으로 청수장에서 출발, 정릉을 들렀다가 아리랑고개에 이어 미아리고개를 넘어 돌아오는 길을 택했다. 고개의 미학은 넘어가는, 넘겨주는 데에 있다. 더구나 정설은 아니지만 ‘아리랑’의 어원이 산 또는 고개를 의미하는 만주어 ‘아린’이나 ‘산 또는 고개를 넘어’라는 뜻의 ‘아리라머’에서 유래했다는 데에 이르면 아리랑고개를 넘어가는 심사는 더욱 각별하기만 하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정선아리랑’ 중에서

왼쪽/정릉 앞 아리랑시장 정류장에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모녀가 아리랑고개를 넘어가는 차를 기다리고 있다. 북한산 산행을 마치고 정릉 쪽으로 내려오는 등산객들은 인근 아리랑시장의 허름한 주막에서 목을 축이기 일쑤인데, 거기엔 아리랑고개의 옛 정취가 그리운 까닭도 없지 않다. 오른쪽/아리랑고개의 정상 부근에는 2004년 춘사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을 기념하는 아리랑시네미디어센터가 들어섰다. 시네센터, 정보도서관, 미디어센터로 구성되어 있으며, 개봉영화 상영을 위한 3개 상영관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상영3관은 한국영화산업의 기반이 되는 다양성을 위한 저자본·독립영화의 상영기회를 보장하기 위해 독립영화전용관으로 지정 운영되고 있다.
왼쪽/정릉 앞 아리랑시장 정류장에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모녀가 아리랑고개를 넘어가는 차를 기다리고 있다. 북한산 산행을 마치고 정릉 쪽으로 내려오는 등산객들은 인근 아리랑시장의 허름한 주막에서 목을 축이기 일쑤인데, 거기엔 아리랑고개의 옛 정취가 그리운 까닭도 없지 않다. 오른쪽/아리랑고개의 정상 부근에는 2004년 춘사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을 기념하는 아리랑시네미디어센터가 들어섰다. 시네센터, 정보도서관, 미디어센터로 구성되어 있으며, 개봉영화 상영을 위한 3개 상영관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상영3관은 한국영화산업의 기반이 되는 다양성을 위한 저자본·독립영화의 상영기회를 보장하기 위해 독립영화전용관으로 지정 운영되고 있다.

아리랑고개는 돈암4거리를 기점으로 동소문동과 돈암동을 지나 정릉길과 교차하는 아리랑시장 앞까지에 이르는 폭 15m, 길이 1,450m의 지선도로다. 예전에는 ‘정릉고개’로 불렸으나 1926년 춘사 나운규(1902-1937)가 일대에서 영화 <아리랑>을 촬영한데 연유하여 ‘아리랑고개’로 부르기 시작했다. 1926년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던 <아리랑>은 조국을 잃은 백성의 울분과 설움을 보여줘 민족의 저항의식을 고취함으로써 한국영화의 살아있는 신화가 되었다. 함북 회령 출신으로, 지역 연고도 없는 이곳에 춘사의 기념관까지 세워준 것은 요절한 천재영화인이자 불운한 시대를 살았던 그의 발자취를 생각할 때 고맙고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8월 9일 새벽 1시 25분, 나운규는 아주 세상을 떠나가 버렸다. 36세를 일기로 억울하게 갔다. (…) 8월 11일 아침 10시 반에 발인하였다. (…) 독립문을 지나 홍제원 고개를 넘을 때는 비가 몹시 왔다. 악사들은 ‘아리랑’ 곡조를 불러서 더욱 슬펐다. (…) 8월 14일 아침 10시 반에 반도영화사 일동은 여러 날 만에 다시 <한강> 로케이션을 떠났다. 문막에서 하룻밤 자게 되었다. (…) 달밤이다. 강변에 누우니 세상일이 모두 꿈만 같다. -윤봉춘 <나운규 일대기> 중에서 

아리랑고개 정상 부근에서 바라본 서울도심. 예전 신덕왕후의 유혼이 이 고개를 넘어올 때 잠시나마 궁궐이 있는 아득한 저편을 되돌아보았을까.
아리랑고개 정상 부근에서 바라본 서울도심. 예전 신덕왕후의 유혼이 이 고개를 넘어올 때 잠시나마 궁궐이 있는 아득한 저편을 되돌아보았을까.

이번에는 ‘단장의 미아리고개’다. 돈암동에서 길음동으로 넘어가는 미아로에 있는 이 고개는 병자호란 때 ‘되놈’, 즉 호인(胡人)들이 넘어왔다 넘어갔던 곳이라 해서 ‘되너미고개’라고 불렀으며, 한자로는 ‘적유령(狄踰嶺)’이라 하였다. 또 일제 때 고개 너머 미아리에 공동묘지가 조성된 후부터 ‘미아리고개’라 칭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특히 6.25전쟁 때 퇴각하던 북한군이 수많은 남측인사들을 이 고개를 넘어 북으로 끌고 간 후 돌아오지 못하게 되자 ‘한 많은 미아리 고개’라는 이름이 붙기도 했으며, 이런 사연을 담은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대중가요가 나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하였다.

미아리 눈물고개 님이 떠난 이별고개
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일 때
당신은 철사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고개

미아리고개를 넘어오면서 되돌아본 풍경. 이번에는 길음동 빌딩숲 너머로 멀리 도봉산의 잔영이 아련하게 펼쳐진다. 지금 발을 딛고 서있는 곳은 미아리구름다리이고, 구름다리 아래에는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비와 함께 미아리예술극장이 자리하고 있다.
미아리고개를 넘어오면서 되돌아본 풍경. 이번에는 길음동 빌딩숲 너머로 멀리 도봉산의 잔영이 아련하게 펼쳐진다. 지금 발을 딛고 서있는 곳은 미아리구름다리이고, 구름다리 아래에는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비와 함께 미아리예술극장이 자리하고 있다.

위로받을 사람과 위로할 사람, 이용할 사람과 이용당할 사람들은 쉽게 연줄이 닿았고, 나쁜 건 빨리 잊어버리는 게 살 궁리하는 데 유리하다는 걸 저절로 터득하고 있었다. 마침내 살아남아 돌아왔다는 감격이 마취제처럼 원한을 달래고 상처를 다독거렸다. -박완서 <그 남자네 집> 중에서 

전쟁이 끝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시달릴 새도 없이 남은 삶을 이어가기 위해 급급했다. ‘10년이 가도 100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소’ 부르짖었지만 눈앞에 닥친 삶 앞에서는 고개 너머 떠나간 이들을 부르는 일 따위는 모두가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 부르짖음은 떠나간 자들보단 도리어 남은 자들을 어르고 달래기 위한 씻김굿이었을 뿐. 산 많고 물 흔한 이 땅은 숱한 고개와 나루로 촘촘히 이어진다. 그 고개마다, 그 나루마다 수많은 사연과 시름들이 마루를 넘고 물을 건넌다. 그리고 삶도 길도 다시 이어진다.  

울고 넘던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고개 

왼쪽/미아리고개 고갯마루에 세워진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비. 세워진 지 20년이 훌쩍 넘어가지만 길옆으로 높게 쌓은 벽에 가려져 있어 하루 종일 찾아와 보는 이 하나 없다. 오른쪽/미아리점성촌 입구. 돈암동을 향해 미아리고개를 내려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점집·작명소·철학관들이 몰려있다. 한국전쟁 전 종로3가에 집단 거주하던 점술가들이 전쟁과 함께 남산 근처로 터를 옮겼고, 남산 주변 정비로 잠시 흩어졌다가 1960년대 말부터 다시 이곳에 정착하였다. 역술인 이도병 씨가 1966년부터 거주한 것이 시초이며, 호황기였던 1980년대에는 약 100여 곳의 점집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의 점술가는 모두 시각장애인이며, 역학에 근거한 점을 본다는 특징이 있다. 1990년대 중반 성북구가 이곳을 ‘전통의 거리’로 개발하려 하였으나 기독교계의 반발로 무산된 바 있다.
왼쪽/미아리고개 고갯마루에 세워진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래비. 세워진 지 20년이 훌쩍 넘어가지만 길옆으로 높게 쌓은 벽에 가려져 있어 하루 종일 찾아와 보는 이 하나 없다. 오른쪽/미아리점성촌 입구. 돈암동을 향해 미아리고개를 내려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점집·작명소·철학관들이 몰려있다. 한국전쟁 전 종로3가에 집단 거주하던 점술가들이 전쟁과 함께 남산 근처로 터를 옮겼고, 남산 주변 정비로 잠시 흩어졌다가 1960년대 말부터 다시 이곳에 정착하였다. 역술인 이도병 씨가 1966년부터 거주한 것이 시초이며, 호황기였던 1980년대에는 약 100여 곳의 점집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의 점술가는 모두 시각장애인이며, 역학에 근거한 점을 본다는 특징이 있다. 1990년대 중반 성북구가 이곳을 ‘전통의 거리’로 개발하려 하였으나 기독교계의 반발로 무산된 바 있다.

-샛길로 : 시장 안의 또 다른 시장, 정릉개울장

‘정릉개울장’은 성북구 정릉시장을 관통하는 정릉천을 따라 봄~가을 매월 2·4주 토요일에 펼쳐지는 시장 안의 또 다른 시장이다. 2014년 정릉시장 활성화사업의 일환으로 마을장터인 ‘개울장’이 처음 이곳에서 열리면서 정릉천이 지역주민들에게 새롭게 인식되기도 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인간의 온정을 느낄 수 있는 ‘개울장’에서는 생활 속 나눔을 실천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추구한다. 주민들이 중고물품을 판매하는 ‘팔장’, 지역청년들이 아트상품을 판매하는 ‘손장’과 시장점포의 먹거리를 배달해주는 ‘배달장’ 등 이름만으로도 재미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흐르는 물과 산책길을 따라 펼쳐진다. 제75회 개울장은 오는 9월 28일(12:00-17:00) 열린다.

여행작가 유성문은 길에서 길의 내력을 들춰왔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새겨왔다. 그 내력과 사연은 먼빛이 되어 다시 그를 길로 내세운다. ‘길에서 길을 묻다’(경향신문), ‘사람의 길’(주간경향) 등 오랫동안 길과 사람 이야기를 써왔다. 문학관기행 <문향을 따라가다>(어문각)를 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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