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백제를 찾아서

한성(서울)은 조선왕도(朝鮮王都) 500년 역사 이전에 이미 500년 왕도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한성백제의 왕도로서다. 기원전 18년,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온 온조 일행이 한강 남쪽 위례성에서 백제를 건국한다. 이때부터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에 의해 웅진성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493년 간 한성은 백제의 도읍이었다. 백제의 역사가 통틀어 678년임을 감안한다면 우리가 흔히 인식하는 것처럼 백제는 ‘웅진(공주)’이나 ‘사비(부여)’의 나라가 아니라 ‘한성’의 나라인 셈이다. 그리고 그에 걸맞게 한성도읍 시절 백제는 최전성기를 누린다. 하지만 이제 그 잔재는 너무도 가뭇하여 허망하기까지 하다. 하여 송파에 남은 한성백제의 잔재를 찾아가는 길은 바람처럼 흩어져버린 한 나라에의 추억으로 덧없기만 한 길이 된다.

한성의 기원을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암사동의 선사유적지와 만난다. 그리고 그 선사시대 사람살이의 흔적은 한성백제시대와도 무려 5000년의 터울이 진다. 도대체 사람살이의 세월은 얼마나 하염없는 것일까. 암사동 시절에 사람들은 땅 위로 나오지 못했다. 움을 파고 땅 밑에서 살았다. 돌도끼와 뼈낚시에 기대어 5000년의 삶을 잇고 또 이어왔다. 그 터전에서 발굴된 빗살무늬토기는 무수한 세월의 흐름을 무수한 빗금으로 남기고 있다. 그 빗금들은 느리게만 여겨졌던 사람살이가 얼마나 순식간이고, 얼마나 가뿐 것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암사동의 강가에 서면 강 건너 멀리 한성백제시대의 몰락을 몰고 왔던 개로왕의 죽음이 이루어진 곳, 아차산성의 잔영이 아련하다. 

사적 제267호로 지정된 암사동 선사유적지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우연히 발견되었다.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인 빗살무늬토기, 간석기인 갈돌, 움집 터 등이 출토되었고, 그밖에 청동기시대 유물과 백제 위례성 시절 독무덤 등도 발굴되었다. 현재는 아홉 채의 움집이 재현되어 있다.
사적 제267호로 지정된 암사동 선사유적지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우연히 발견되었다.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인 빗살무늬토기, 간석기인 갈돌, 움집 터 등이 출토되었고, 그밖에 청동기시대 유물과 백제 위례성 시절 독무덤 등도 발굴되었다. 현재는 아홉 채의 움집이 재현되어 있다.

‘바람드리’ 풍납토성은 <삼국사기>에서조차 ‘미상지명(未詳地名)’으로 표기되었던 위례성의 소재지설(所在地說)을 두고 이러저러한 바람에 휩쓸렸다. 처음 하남시 춘궁리 일대로 추정되다가, 다음에는 몽촌토성으로 굳어져가는 듯하던 위례성 소재지 연구는 1997년 1월 예기치 않았던 사건으로 급변을 맞는다. 새해 연휴에도 풍납토성 지표조사를 벌이던 선문대학교 학술조사단은 인근 아파트 건설을 위한 터파기 공사현장에서 무더기로 차단 방치되어 있는 백제 토기 파편들을 발견하고 이 사실을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에 제보한다. 이에 따라 즉각적인 현장검증이 이루어지고, 뒤이어 긴급 구제발굴이 진행되었다.
발굴 결과 풍납토성의 중요성을 인식한 당국에서는 건축공사를 제한하는 행정조치를 취한 후 대대적인 연구조사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엄청난 수습유물과 방대한 규모의 유구로 미루어 풍납토성이 유력한 위례성 소재 후보지로 떠올랐고, 지금은 거의 정설로 굳어졌다. 하지만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풍납토성에 대한 발굴조사는 전체의 절반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미 성 내부에 주택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데다 재개발 허가신청도 줄을 잇고 있지만 이를 막을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2000년에는 아파트 신축이 어려워지는 것을 우려한 재건축조합원들이 중장비를 동원해 유적 일부를 훼손하는 일까지 벌어졌고, 2015년 박원순 서울시장이 ‘백제왕이 꿈속에 나타나서 풍납토성 복원을 결심했다’는 글을 페북에 올려 때 아닌 논란이 일기도 했다. 

현재 풍납토성 내에서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흔적이라곤 일부만 남아있는 둔덕 형태의 성벽밖에 없다. 풍납토성은 본디 둘레가 4km에 달하는 큰 토성이었으나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남서쪽 일부가 잘리고, 이후 서울이 연이어 개발되는 와중에도 특별한 보호 없이 방치되는 등 잡다한 사유들로 말미암아 현재는 2.7km 가량만이 남아있다.
현재 풍납토성 내에서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흔적이라곤 일부만 남아있는 둔덕 형태의 성벽밖에 없다. 풍납토성은 본디 둘레가 4km에 달하는 큰 토성이었으나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남서쪽 일부가 잘리고, 이후 서울이 연이어 개발되는 와중에도 특별한 보호 없이 방치되는 등 잡다한 사유들로 말미암아 현재는 2.7km 가량만이 남아있다.

한성백제의 자취를 따라가는 길은 올림픽공원 앞에서 잠시 멈칫거린다. 88서울올림픽을 기념하여 세워진 ‘세계평화의 문’이 몽촌토성으로 향하는 길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그리 탓할 일만은 아니다. 몽촌토성은 풍납토성과는 달리 88서울올림픽 체육시설 건립 예정지로 결정되면서 1983년부터 모두 6차에 걸친 발굴 복원이 이루어졌고, 1986년 조성된 올림픽공원 덕분에 그나마 시민들이 편안하게 산책을 즐길 수 있는 지금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유물이나 유적은 거기에 담긴 역사적 사실이나 가치에 못지않게 어떤 모습으로 우리와 만나느냐도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몽촌토성으로서는 천만 다행스러운 일이고, 그런 몽촌토성을 가깝게 만날 수 있는 우리로서도 고맙고도 행복한 일이다.

올림픽공원은 원래 1986년 서울아시아경기대회와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를 목적으로 건설되었으나, 지금은 체육·문화예술·역사·교육·휴식 등 다양한 용도를 갖춘 종합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공원 안에는 몽촌토성(사적 제297호)이 복원되어 있고, 세계 110개국 200여 조각가들의 작품으로 조성된 올림픽조각공원, 세계평화의 문, 88놀이마당, 산책로, 올림픽문화센터, 야생화단지, 야외미술관 등 다양한 시설이 있다.
올림픽공원은 원래 1986년 서울아시아경기대회와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를 목적으로 건설되었으나, 지금은 체육·문화예술·역사·교육·휴식 등 다양한 용도를 갖춘 종합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공원 안에는 몽촌토성(사적 제297호)이 복원되어 있고, 세계 110개국 200여 조각가들의 작품으로 조성된 올림픽조각공원, 세계평화의 문, 88놀이마당, 산책로, 올림픽문화센터, 야생화단지, 야외미술관 등 다양한 시설이 있다.

몽촌토성은 일반적으로 토성이라 부르지만 사실 순수한 토성은 아니다. 남한산에서 뻗어내린 최고높이 44.8m인 타원형의 자연 구릉을 이용하여 구릉이 낮거나 끊긴 부분에만 이른바 ‘판축기법’에 따라 입자가 곱고 잘 들러붙는 점토를 5~10㎝ 두께로 차곡차곡 올려쌓은 산성이자 토성인 것이다. 성벽의 바깥쪽은 경사면을 깎고 다듬어서 급경사를 만들고, 그 경사면에 목책을 설치하여 방어에 용이하도록 했다. 성벽 밖으로는 방어용 물길인 해자를 둘렀으며, 성벽 바로 안쪽의 네 지점에는 주위보다 3~5m 정도 높게 토단을 마련하여 망루 역할을 하도록 했다. 규모는 면적이 13만6000여 평에 성벽 전체 길이가 2285m에 달하는 큰 성으로, 성의 동북쪽 밖으로는 270m 가량 이어지는 외성이 있다. 

몽촌토성의 목책. 토성을 보호하기 위해 성벽 바깥에 세웠던 목책의 흔적이 발굴 당시 발견되었다. 그중 일부를 복원한 것으로, 토성 안에서 가장 원래의 성벽에 가까운 모습을 띠고 있다.
몽촌토성의 목책. 토성을 보호하기 위해 성벽 바깥에 세웠던 목책의 흔적이 발굴 당시 발견되었다. 그중 일부를 복원한 것으로, 토성 안에서 가장 원래의 성벽에 가까운 모습을 띠고 있다.

방이동고분군은 백제와 신라간의 교류관계, 혹은 신라의 북진에 따른 한강유역 진출을 증명해주는 유적이다. 고분들이 발견된 주변지역이 백제 초기의 수도가 있었던 지역이고, 몽촌토성·풍납토성·석촌동고분군·가락동고분군 등이 모두 백제의 유적들이라는 점을 들어 방이동 고분 역시 백제시대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4·5·6호분 등에서 출토된 회청색 경질 토기인 굽다리접시가 전형적인 신라양식을 띠고 있고, 널길의 위치와 관대(棺臺)의 방향 등이 경주지역의 무덤들과 비슷한 점으로 보아 이 무덤을 쌓은 주인공들은 신라 사람들이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처럼 방이동고분군은 한성백제시대 말기의 중요한 유적이지만 지금은 아파트 숲에 갇힌 옹색한 형국으로 남아있어 자못 비감함을 자아낸다. 

방이동고분군의 정문을 통과하여 계단을 오르면 가볍게 경사진 언덕 위로 비스듬히 솟아오른 무덤들이 차례로 눈에 들어온다. 서북쪽 언덕에 제1·2·3·6호분이 자리 잡았고, 동남쪽에는 제4·5·7·8호분이 위치하고 있다. 원래 이곳은 표고 30~50m 정도의 야트막한 구릉지대로, 고분과 민묘 30여 기가 뒤섞여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강남 개발붐이 한창일 때 이 일대가 토사채취장으로 변하면서 구릉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 쉼 없이 아파트와 빌딩들이 들어차는 바람에 지금처럼 간신히 고분 8기만이 살아남아 ‘도심 속의 섬’이 되고 말았다.
방이동고분군의 정문을 통과하여 계단을 오르면 가볍게 경사진 언덕 위로 비스듬히 솟아오른 무덤들이 차례로 눈에 들어온다. 서북쪽 언덕에 제1·2·3·6호분이 자리 잡았고, 동남쪽에는 제4·5·7·8호분이 위치하고 있다. 원래 이곳은 표고 30~50m 정도의 야트막한 구릉지대로, 고분과 민묘 30여 기가 뒤섞여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강남 개발붐이 한창일 때 이 일대가 토사채취장으로 변하면서 구릉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 자리에 쉼 없이 아파트와 빌딩들이 들어차는 바람에 지금처럼 간신히 고분 8기만이 살아남아 ‘도심 속의 섬’이 되고 말았다.

한성백제 답사는 석촌동고분군에서 일단 마무리된다. ‘돌마리’ 또는 ‘돌말’이라 불리던 석촌동 일대에는 일제 때만 해도 흙무덤 23기, 돌무덤 66기, 합하여 89기에 이르는 고분이 있었다고 한다. 또 현재 눈으로 볼 수 있는 고분 외에 조사와 발굴을 통해 널무덤 12기, 독무덤 6기, 즙석봉토분 2기, 토광적석묘 1기, 돌덧널무덤 1기가 산재하여 있음이 확인되었다. 가히 ‘옛 무덤 전시장’이라 부를 만하다. 하지만 그들은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속속 파괴되고, ‘교육효과’가 낮다는 이유로 복원에서 배제되는 바람에 지금은 그저 8기의 무덤만이 한껏 왜소해진 채 겨우 안주의 땅을 허락받아 ‘불안한 평화’를 누리고 있다. 돌무덤들 너머로 보이는 롯데월드타워의 웅장한 자태가 더욱 위압적으로 느껴지는 까닭이다. 언젠가 그 너머로 그를 위압하는 그 무엇이 또 들어서게 될까.

왼쪽/석촌의 돌무덤들 뒤로 롯데월드타워의 자태가 거대한 타임머신처럼 다가온다. 그 거리는 가뭇없이 2000년을 넘나든다. 오른쪽/석촌동고분군의 소나무는 이곳이 예나지나 사시사철 솔바람 부는 성스러운 장소임을 깨우쳐준다.
왼쪽/석촌의 돌무덤들 뒤로 롯데월드타워의 자태가 거대한 타임머신처럼 다가온다. 그 거리는 가뭇없이 2000년을 넘나든다. 오른쪽/석촌동고분군의 소나무는 이곳이 예나지나 사시사철 솔바람 부는 성스러운 장소임을 깨우쳐준다.

√2019 한성백제문화제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옛 고대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웠던 한성백제시대의 역사문화를 계승하여 당시의 위용과 영광을 재현하고, 송파구민의 문화적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백제의 건국, 2천년 고도 서울을 열다’의 타이틀 아래 <2019 한성백제문화제>가 9월 27일부터 29일까지 올림픽공원 평화의 문 광장 일대에서 펼쳐진다.
송파구는 백제시대 678년(BC18~AD660)의 전체 역사 중 송파에 도읍을 두었던 한성도읍기가 493년으로 가장 길었고, 해상강국으로서 최대 전성기를 누렸던 점에 착안해 1994년부터 한성백제문화제를 개최해왔다. 체험형 역사문화축제를 지향하며 차별화된 콘텐츠를 선보여 서울에서 유일하게 6년 연속 문화관광축제로 선정되었고, ‘세계축제올림픽’이라고 불리는 피너클 어워드 7년 연속 수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축제기간 동안 송파구 곳곳이 백제시대로 탈바꿈한다. 백제인들이 살던 마을이 꾸며지고, 당시의 음식과 문화를 체험하는 자리도 마련된다. 올림픽로에서는 백제의 왕과 신하, 백성들이 이루는 대형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축제를 하루 앞둔 26일 오후 7시에는 석촌동고분군에서 ‘동명제’가 열린다. 이는 축제의 성공을 기원하는 제례의식으로, 의식 전후에 다양한 공연이 펼쳐진다. 올해는 뮤지컬 공연 ‘근초고왕, 위례에서 백제를 꽃피우다’가 무대에 오른다.
송파구는 올해 백제문화권에 속하는 다른 지방자치단체와 첫 교류를 추진한다. 부여·공주 ‘백제문화제’와 주제공연을 교류하고, 하남시 ‘이성산성축제’에도 한성백제문화제 홍보부스를 개설해 운영한다. 특히 한성백제문화제 20회째를 맞는 내년부터는 ‘대(大)백제문화제’(가칭)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교류를 시작한다. 부여, 공주, 익산, 하남 등 백제문화권 지자체간 MOU를 체결하고, 해외홍보, 팸투어 교환, 관광코스 개발 등 협력사업을 적극 발굴할 계획이다.

여행작가 유성문은 길에서 길의 내력을 들춰왔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새겨왔다. 그 내력과 사연은 먼빛이 되어 다시 그를 길로 내세운다. ‘길에서 길을 묻다’(경향신문), ‘사람의 길’(주간경향) 등 오랫동안 길과 사람 이야기를 써왔다. 문학관기행 <문향을 따라가다>(어문각)를 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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