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ㆍ칼럼니스트
시인ㆍ칼럼니스트

작가 박완서는 나이 마흔이 되던 1970년, 장편 ‘나목(裸木)’이 《여성동아》 여류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 늦깎이 등단했다. 그 뒤 그는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1977)’, ‘엄마의 말뚝(1980)’ 등을 발표하며 80년대 중반 이후부터 한국 여성문학의 대표작가로 주목받았다. 늦게 시작했음에도 한국 문학계에 큰 획을 긋고 간 그의 발자취는 늦깎이 문학도들에게 희망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에 비해 최인호는 서울고 2학년 재학 중이던 196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벽구멍’을 응모, 가작으로 입선했다. 바로 1년 전에는 황석영도 18세 나이로, 그것도 ‘사상계(思想界)’를 통해 등단해 빛이 좀 바래긴 했어도 그 무렵엔 놀라운 일이었다. 그 뒤 그는 22세의 나이로 연세대 재학 중에 쓴 단편 ‘견습환자’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등단했다. 침샘암으로 투병생활을 했던 그가 영원한 ‘별들의 고향’으로 돌아간 지 어느덧 6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영원한 문학청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른바 ‘탈고(脫稿)의 계절’이다. 가을로 접어들며 각 신문사들이 신춘문예 공고를 다투어 내기 시작했다. 더구나 늦가을의 쌀쌀한 바람이 옷깃을 더욱 여미게 하는 이맘때면 전국의 예비문학도들은 신춘문예의 높은 벽을 향한 바이러스에 감염된 채 지독한 몸살을 앓기 시작한다. 한 해 동안 피를 말리며 다져온 원고지와의 싸움에 종지부를 찍어야 하는 소중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이 돌림병은 신춘문예 공모를 알리는 사고(社告)가 실릴 때부터 시작하는데, 그 증상은 이렇다. 대개는 안절부절못한다. 밥맛을 잃고, 잠을 설치고, 돌연 침울해지고, 식은땀을 흘리며 괴로워하고, 비명을 지르다가도 미친 듯 웃는다. 사람들은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다. 마치 중요한 비밀을 다루는 국가의 정보국 사람처럼 보인다.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만 몰래 무언가 끼적인다. 이들은 외상이 없기 때문에 멀쩡해 보이지만 자세히 관찰해 보면 반쯤은 얼이 빠진 상태다."(장석주 '지금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 중에서)
 
장석주 시인이 신춘문예 열병을 앓는 문학청년들의 증상을 묘사한 부분이다. 스무 살에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한 만큼 '문청(文靑)'들의 심리를 훤히 꿰뚫고 있음이 엿보인다. 장 시인은 이 돌림병은 새해가 되면 감쪽같이 사라진다고 덧붙였다. 큰 후유증이 없는 아름다운 병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1925년 동아일보에서 처음 도입한 신춘문예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제도로, 도입된 지 9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가장 매력적인 작가 등용문으로 통하고 있다. 예비문인들이 이 제도를 통해 자신의 창작 역량을 시험하고 등단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신춘문예는 오랜 세월을 거치며 가장 중요한 신인들의 등용문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또한 신문이라는 대중매체가 순수문학의 영역에 기여할 수 있는 역할로서 문단의 신인을 배출할 수 있는 이 제도를 선호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리고 이 제도가 공정한 심사로 운영되어 수많은 문인들을 문단에 내보낸 전통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돋보인다. 하지만 한쪽에서는 신춘문예 무용론(無用論)도 고개를 들고 있다. 어느 기관에서 신춘문예 당선자 50명의 10년 후를 조사해 보니 단행본을 한 권 이상 낸 작가는 58%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는 단 한 권의 책도 내지 못했다고 한다. 소설가 김영하는 ‘머지않은 장래에 신춘문예 대부분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도 아랑곳없이 아직도 새해 첫날이면 신문 지면에 당선작이 대문짝만 하게 실리고 행운아는 화려하게 이름을 올린다. 행운을 잡지 못한 문학도에게는 진한 아쉬움이 밴 새로운 시작일 수도 있다. 어쩌면 선택받지 못한 작품이 당선작보다 더 훌륭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보기도 한다. 아무쪼록 희망과 용기를 잃지 마시기 바란다. ‘탈고(脫稿)의 계절’. 예비문학도들의 문운(文運)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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