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약령시와 청량리

한성 안팎에 사는 굶주리는 백성들을 모두 활인원(活人院)에 보내어 도움을 받게 하였더니 전염병에 걸릴까 무서워 도망치고 떠돌아다니는 사람도 많으므로 가옥이 장차 용납할 수 없게 되리니 보제원(普濟院)·이태원(利泰院) 두 원에 별도로 진제장(賑濟場)을 세우고 한성부에서 5부 관리와 함께 검찰하게 하라. -<세종실록>에서 

아무리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지만 구휼은 늘 국가의 가장 중요한 책무였다. 반대로 배고프고 아픈 이에게 나라가 다 무슨 소용일까만 백성들에겐 달리 기댈 곳도 없었다. 조선시대 동대문 바깥에 있던 보제원은 관리나 여행자들의 숙소로 활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진제장을 세워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하고 약을 나눠주는 구휼기관이기도 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거래되는 한약재의 70% 정도를 유통하는 서울약령시는 옛 보제원의 명맥을 잇고 있다. 그리고 그 성장배경에는 경동시장이 자리하고 있다.

서울약령시에 들어선 서울한방진흥센터는 다양하고 특성화된 전시, 체험, 교육을 통해 우리 전통의학의 우수성과 안전성을 널리 알리고자 설립된 한방복합문화시설이다. 한의학박물관, 보제원(이동진료실, 한방체험실), 한방뷰티숍, 한방상품홍보관, 한방카페, 족욕체험장, 약선음식체험관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서울약령시에 들어선 서울한방진흥센터는 다양하고 특성화된 전시, 체험, 교육을 통해 우리 전통의학의 우수성과 안전성을 널리 알리고자 설립된 한방복합문화시설이다. 한의학박물관, 보제원(이동진료실, 한방체험실), 한방뷰티숍, 한방상품홍보관, 한방카페, 족욕체험장, 약선음식체험관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해방 이후 당시 경춘선의 시발역이었던 성동역 주변에 경기도와 강원도 등에서 난 산나물과 마늘, 고추 등의 농산물을 판매하는 노점들이 형성되었고, 그를 바탕으로 1960년 경동시장이 개설되었다. 이와 함께 종로에서 한약재를 판매하던 사람들과 한의사들이 종로의 땅값 상승과 교통 혼잡 등의 이유로 경동시장으로 이전해 오면서 한약재와 한의원이 급속도로 증가했다. 경기도와 강원도에서 생산된 약재가 경동시장으로 유입된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경동시장은 시간이 흐르면서 한약재시장으로 특화되었다. 가장 큰 계기는 서울시가 1995년 전통 한약시장 지역으로 지정한 뒤의 일이었다. 그 이후 경동시장은 약령시로 변화했다. 이처럼 경동시장이 약령시로 변화하자 주변에 한솔동의보감타워, 롯데불로장생타워, 삼환동의보감타워, 한방천하 등이 한방타운을 형성했다. 오늘날 경동시장은 서울약령시는 물론 광성상가, 경동신시장 등을 포괄하는 거대 시장이다. 

초기 농산물과 임산물, 산나물 등을 주로 취급하던 경동시장은 1960년대부터 강원과 경기, 충청도에서 약초를 구입하던 약재상들이 모여들면서 한약재 시장을 형성했다.
초기 농산물과 임산물, 산나물 등을 주로 취급하던 경동시장은 1960년대부터 강원과 경기, 충청도에서 약초를 구입하던 약재상들이 모여들면서 한약재 시장을 형성했다.

경동시장과 이어지며 청량리 일대를 온통 전통시장타운으로 만들고 있는 청량리시장은 해방 이후 남대문시장, 성동시장과 함께 서울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시장 중 하나였다. 청량리시장은 1949년 사설시장으로 개설되었으며, 당시 점포의 수는 290여 개에 달했다. 오늘날 ‘청량리’라는 이름이 붙은 시장은 청량리종합시장과 청량리수산시장, 청량리청과물시장, 청량리전통시장, 청량리종합도매시장, 청량리농수산물시장 등으로, 6개의 시장이 경동시장을 에워싸듯이 포진하고 있다.
청량리시장은 개설 때부터 청과물시장으로 유명했다. 당시 남대문시장은 어물, 성동시장은 곡물, 청량리시장은 청과로 특화된 시장이었다. 그러나 청량리시장은 도매시장으로 허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서울시에서는 1997년 구리농수산물도매시장을 개장해 농산물의 도매를 맡겼다. 동시에 청량리시장에서는 더 이상 농산물을 취급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많은 상인들은 구리농수산물도매시장 입주를 거부하고 그대로 남았다. 오늘날 여전히 청량리에 시장이 남아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서울약령시, 경동시장, 청량리시장들은 서로 인접해 있어 어디로든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주말이면 일대가 거대한 시장타운을 형성해 몰려드는 인파로 흥성거린다. 아무래도 전통시장지역인 만큼 노년층들이 많이 찾는다.
서울약령시, 경동시장, 청량리시장들은 서로 인접해 있어 어디로든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주말이면 일대가 거대한 시장타운을 형성해 몰려드는 인파로 흥성거린다. 아무래도 전통시장지역인 만큼 노년층들이 많이 찾는다.

‘청량리’라는 지명은 이 지역에 위치한 청량사(淸凉寺)에서 유래했다. 신라 말에 세워진 청량사는 1896년 서울의 비구니 4대 승방의 하나인 돌곶이승방이 이곳으로 이전하면서부터 청량사로 불렸다고 한다. 청량사가 있던 바리봉의 수목이 울창하고 샘이 맑았는데, 남서쪽이 트여 있어 늘 시원하고 청량한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청량리는 어느 때인가부터 ‘청량리588’이라는 오명으로 기억되는 곳이 되고 말았다. 기실 ‘청량리588’이란 이름의 기인이 된 청량리역은 청량리동이 아니라 전농동에 위치해 있다. 청량리동 주민들로서는 조금 억울할 법도 한데, 일대를 뭉뚱그려 그냥 청량리라 불렀으니 딱히 어쩔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영자의 전성시대’를 상징했던 ‘청량리588’은 오랜 실랑이 끝에 2000년대를 넘어서면서 뉴타운지구로 지정되었고, 2019년 재개발 보상이 마무리되어 현재는 일대 건물을 철거하고 대규모 주상복합건물을 신축 중이다. 얼마 전에는 서울시가 청량리4구역 재개발단지로 지정된 이 일대에 ‘역사생활문화공간’ 조성 구상을 내놓으면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조성예정지에 성매매업소로 쓰인 한옥 1채가 포함되자 일부에서 고작 성매매업소를 보존하기 위해 혈세를 낭비하는 것 아니냐며 목청을 높인 것. 이에 대해 서울시는 “한옥보존 차원일 뿐이며, 리모델링을 통해 여행자 편의시설로 바꾸면 성매매업소 이미지는 사라질 것”이라며 일축했다지만, 논란과는 별도로 씁쓸한 뒷맛은 남는다. 집을 없앤다고 그 집에 대한 기억마저 사라질까. 

한창 재개발공사가 진행 중인 옛 집창촌 골목으로 들어서자 웬걸, 마지막 ‘영자’가 남아있었다. 대낮 낡은 한의원 간판 아래 반쯤 열린 유리문 사이로 삐죽 나온 누이의 굽 높은 구두가 가슴을 시리게 한다.
한창 재개발공사가 진행 중인 옛 집창촌 골목으로 들어서자 웬걸, 마지막 ‘영자’가 남아있었다. 대낮 낡은 한의원 간판 아래 반쯤 열린 유리문 사이로 삐죽 나온 누이의 굽 높은 구두가 가슴을 시리게 한다.

치유는 역시 숲에 있을까. 옛 구휼기관이 있던 곳을 지나, 노인들의 시장을 지나, ‘청량리588’을 지나 옛 홍릉의 숲으로 들어선다. 홍릉수목원은 1922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수목원이다. 명성황후의 무덤인 홍릉이 1919년 남양주로 이전하기 전까지 이곳 천장산 자락에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앞에서 이야기한 청량사가 원래 옛 홍릉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가 명성황후 시해 후 묘역이 조성되면서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고 한다. 지금 홍릉수목원 안에 남아있는 어정(御井)은 옛 홍릉의 기억을 자못 쓸쓸히 전한다.

어정은 홍릉에 들렀던 고종(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이 잠시 쉬며 목을 축이던 곳이다. 키 작은 나무들로 둘러싸인 아늑한 어정에서 명성황후의 능에 행차했던 황제가 황후를 그리며 잠시 쉬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안내판이 또 있었을까. ‘고종(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라는 문구 빼고는 온통 상상뿐인 안내판은, 그래서 이 쓸쓸한 유물의 안내판으로 더없이 적격이다. 그리고 소슬하다. 어쩌면 고통도 상상일 뿐이고, 치유도 상상일 뿐인지 모른다. 모든 기억조차도 상상일지도 모른다. 그 가뭇없는 상상들은 꽃으로 피고지고, 나무로 뿌리내리고 열매 맺으며 또 다른 숲을 이룬다. 그리고 그 숲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가본 길과 가보지 못한 길이. 

홍릉수목원에는 20만여 개체의 식물들이 자란다. 수목원을 조성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하나둘 모은 것들이다. 그래서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도 역사와 정성이 묻어있다. 그리고 그 숲에서 사람들은 숲이 된다. 아이들도 숲이 되고, 연인들도 숲이 되고, 홀로라도 숲이 된다.
홍릉수목원에는 20만여 개체의 식물들이 자란다. 수목원을 조성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하나둘 모은 것들이다. 그래서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도 역사와 정성이 묻어있다. 그리고 그 숲에서 사람들은 숲이 된다. 아이들도 숲이 되고, 연인들도 숲이 되고, 홀로라도 숲이 된다.

여행작가 유성문은 길에서 길의 내력을 들춰왔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새겨왔다. 그 내력과 사연은 먼빛이 되어 다시 그를 길로 내세운다. ‘길에서 길을 묻다’(경향신문), ‘사람의 길’(주간경향) 등 오랫동안 길과 사람 이야기를 써왔다. 문학관기행 <문향을 따라가다>(어문각)를 펴내기도 했다.

저작권자 © 애플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