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곤 현 KBS아나운서실 방송위원 겸 방송통신심의원회 방송언어특별위원회 위원.
강성곤 현 KBS아나운서실 방송위원 겸 방송통신심의원회 방송언어특별위원회 위원.

80년대 중∙후반 90년대 초, 제1라디오 오전 10시/11시 라디오뉴스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일근조 조장도 못했다. 대선배들 예우 차원에서 아나운서 방송위원실에서 도맡았다. 10시 뉴스는 거의 K선배의 몫. 청취율 높은 뉴스였는데, 이분은 뉴스가 약했다. 음성은 좋았지만 주의력이라든가 예민함이 좀 부족했다.(이제는 말할 수 있다!)

헛갈리겠다 싶은 외래어는 꼭 틀렸다. 문제는, 10시/11시 뉴스는 그 좁은 방에서, 당시 새로 나온 인켈INKEL 튜너로 쩡쩡 울리게 틀어놓는다는 사실. 현업 담당 실세 L선배의 지시였다. 잘하면 배우고 못하면 너희도 반성하라! 침묵의 정언명령定言命令이었다.

오늘 옛 자료를 정리하다, 그 때 메모가 발견되었다. ‘카브리 사건’이 있던 날, 대로大怒한 L이 “야, 말번! 요즘 자주 틀리는 외래어 싹 정리해서 내 책상에 갖다 놔!” 그 결과물.(*카브리 사건- 카리브 해는 실종되고 내내 카브리로 흥건했던 뉴스에 아나운서 실원들 모두 다 아연실색. 여자 아나운서들은 연신 ‘어떡해, 어떡해!’ 남자들은 숨죽여 ‘킥킥’. 이윽고 L의 일갈, “당신들은 잘해? 제 얼굴에 침뱉기야. 이거야 창피해서 원.”) 하필 청중도 너무도 많았다. L은 정말 너무 무서웠다!

실물 공개는 피치 못할 사연으로 불가하다. 당연히 손글씨인데다가 개인정보 철철, 불온한 상상, 드문드문 비속어 등이 이유다. 일일이 지우기도 힘들다. 너무 오래된 사례들인가? 장년층에겐 추억의 편린일 수도.

카브리 해→카리브 해, 에레베스트→에베레스트, 무라바크→무바라크, 사라만치→사마란치, 모스코바→모스크바, 카나다→캐나다, 구테타→쿠데타, 쇼파→소파, 캬바레→카바레, 브리샤→브리사, 믹샤/믹사→믹서, 콤프레샤→컴프레서, 스치로폴→스티로폼, 스튜디어스→스튜어디스, 키에르 게코르→키에르 케고르(→쇠렌 키르케고르), 내바다이→내다바이(ねたばい/사기詐欺), 스트롱→스트로, 프랑카드→플래카드, 아케이트→아케이드, 바리케이트→바리케이드, 콤플락지→카무플라주(camouflage, 프랑스어) 등.

요즘 많이 틀리는 건,
시네마 현→시마네 현(しまねけん/島根県), 싸이비(발음)→사이비似而非(사이비를 영어로 착각하는 방송인들이 가끔 보임.)

에스퍼가 들고 온 ‘3가지’ 청구서

아라비아 숫자만 쓰기가 도를 넘었다. 명료성/간결성/시각적 효과를 모르는 바 아니나 과도하다. 이 추세라면, 가뜩이나 읽기 젬병인 우리 청소년들, ‘삼가지’로 읽을 날이 오지 말란 법 없을 터.

공간이 부족하지 않다면, 발화發話를 늘 의식해야 좋은 타이틀이다. 거기다 고유어 쓰기라는 좋은 가치까지 보태는 일석이조다.

2~3→두세, 3~4→서너, 4~5→네다섯/네댓/너더댓, 너댓(X), 5~6→대여섯, 6~7→예닐곱, 7~8→일고여덟/일여덟, 8~9→엳아홉/여덟아홉을 일단 환기해 보길 권하면서, 적어도 예닐곱까진 토박이말 존중 차원에서라도 활용해 봄직하다.

이참에 보태면 서/너(석/넉)의 존재다. 3~4는 우리말에 있어 특별하다. 특정 단위 앞에서는 세네 대신 서너/석넉을 쓴다. 거의 틀림없이,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발음 지향과 관련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종이 석 장만 갖고 와. 넉 달만에 그 일을 해냈다고?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서 푼짜리 오페라. 고기 석 점에 벌써 배가 불러? 그림을 석 점이나 얻어 오다니. 매를 넉 대나 맞았어? 1년에 차를 스물 석 대나 팔았군. 그이와 바둑 두면 석 점은 깔아야 돼. 서너 달 지나면 겨울이야. 오토바이 서너 대가 지나갔어.

답답한가? 시쳇말로 구린가? 아니라고 말해다오. 이런 게 한국어의 멋과 맛이다.

KBS 강성곤 아나운서는 1985년 KBS입사, 정부언론외래어공동심의위위원, 미디어언어연구소 전문위원, 국립국어원 국어문화학교 강사를 역임했으며 건국대, 숙명여대, 중앙대, 한양대 겸임교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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