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만 한서대 교수
박경만 한서대 교수

AI, 사물인터넷, 합성생물학 등과 같은 지능형 기술은 당연히 인간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IT와 디지털 문명이 발달할수록 주객이 전도되어, 사이버 공간을 위협하고, 인간 조건을 훼손하는 기술도 덩달아 첨단으로 치닫고 있다. 마침 새해 벽두 경제지 <포브스>가 지적한, ‘사이버 공간을 위협하는 7가지 위험 기술(Tech Risk)’은 이런 부조화스런 현실을 곱씹어보게 한다.

그에 따르면 대량살상무기로 동원될 ‘드론 군단’이 첫 번째 위험기술로 등장한다. 물론 선한 목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지만, 자칫 치명적인 살상과 살인무기로 돌변할 가능성도 크다고 염려한다. ‘감시 기술’과 ‘얼굴 인식’ 기술 또한 우리네 삶의 평온함을 위협할 수 있는 고약한 것들이다. AI기술 등으로 개인과 가족의 시시콜콜 정보를 긁어모으고, 이를 사생활 감시나 적대적 인물을 추적, 제거하는데 쓰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스마트 더스트’도 마찬가지다. 먼지 만큼이나 작은 센서가 인간과 도구의 온갖 부위에 파고들어 미세한 스파이 노릇을 한다. 그리곤 개인의 사생활을 염탐하며, 범죄적 엽기 행각을 일삼기도 한다.
 
우리에게 이미 낯익은 ‘랜섬웨어’나 ‘스피어 피싱’도 날로 기승을 떨 것으로 보인다. 컴퓨터 시스템을 망쳐놓곤, 이를 볼모로 돈을 요구하는 ‘날강도’와 같은 것들이다. 또 ‘그로버(GROVER)’와 같은 가짜 뉴스 로봇들도 극성을 부릴 것 같다. 이들은 사람이 만든 것보다 더욱 그럴듯한 거짓말을 마구 퍼뜨린다. 사실과 진실에 대한 아노미적 혼돈을 유발하고, 온통 불신과 증오로 한 사회가 멍들게 한다. AI를 이용한 복제기술 또한 더욱 발달해서 이런 그악스런 풍조를 한층 부추길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것들은 디지털 세상의 미래를 암담하게 하는 암적 존재들이다.
 
하긴 이런 위험기술들은 당장의 편리와 쾌락을 위해 기술만능의 우상을 우러른 결과다. 맹목적 소비와 소유양식에 매몰되고, 존재론적 고민이 결여된 회색빛 기술주의 파시즘과도 닮은 것이다. 애초 IT문명이 지향하는 NBIC(Nano-Bio-Information Technology. Cognitive Science), 즉 나노 ․ 바이오 ․ 정보통신, 인지과학의 융합세상은 이런 숙명적 위험을 담지하고 있다. 인문학적 궁리(窮理)와 섞이기보단, 무개념의 도구주의와 기술만능을 맹신하는 경향이 심화되어 있다. 공학적 연구와 성취에 자족할 뿐, 존재에 대한 질문은 표백되어 있다. 이런 비(非)존재론적인 도구주의는 테크노퓨처리즘이니 트랜스휴머니즘이니 하는 것들로 연결되고, 그 아류의 초기 증상이 목전의 ‘위험기술’들이다.
 
그렇다면 답은 자명하다. IT세상이 만개할수록, 기술과 인간의 조화에 대한 각성이 필수적이다. 예컨대 ‘적정기술’을 대안의 하나로 생각할 법 하다. 양자가 배타적 ‘소유’의 관계를 넘어, 기술이 인간 삶의 방식을 선하게 규정짓는 ‘존재’로 자리한다고나 할까. 사람과 기계 사이의 바람직한 상호 작용을 촉진하며, 기술을 사용하는 궁극적 목표를 인간의 발전에 맞추는 것이다. 비단 적정기술 뿐만 아니다. 그 어떠한 화려한 기술혁명도 종국엔 휴머니즘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어떤 형질과 수준의 기술이 우리 삶에 ‘가치’를 더해주는지 끝없이 질문해야 할 것이다.
 
전기자동차와 태양광의 지평을 처음 선보인 엘런 머스크는 “아이디어는 돈 벌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고 했다. 인간의 삶을 얼마나 유익하고 편리하게 만들어주는가, 그게 진짜 기업하는 이유라고 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기술일지라도 ‘인간’이 결여되면 곧 ‘반(反)인간’적이며, 인류의 적이 될 수 밖에 없다. 그 틈새에서 독버섯처럼 자란 ‘위험기술’이 기술만능 세상과 어우러진다면, 그땐 정말 디스토피아의 망령이 다가온다. <포브스>는 “기술이 지능화되고, 촘촘하게 연결될수록 부작용의 파급력도 증가한다”고 경계했다. ‘인간’이 결여된 과학기술, 그래서 병든 소비를 유혹하며 미소짓는 기술 파시즘을 예고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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