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가거든 반갑다고 인사나 하라
거기 가거든 반갑다고 인사나 하라
  • 유성문(먼빛)
  • 승인 2020.01.24 13:15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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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길과 낙원상가, 그리고 익선동

인사동에 와서도/ 인사동을 찾지 못하는 것은/ 동서남북에 서 있어도/ 동서남북이 보이지 않기 때문/ 그렇게 찾기 어려운 인사동이/ 동은 낙원동으로 빠지고/ 서는 공평동으로/ 남은 종로 2가에서/ 북은 관훈동으로 사라지니/ 인사동이 인사동에 있을 리가 없다/ 종로 1,2,3,4가가 어우러져/ 하루 6만 명의 발걸음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사람의 물결/ 조선시대 관인방(寬仁坊)의 인(仁)과 대사동(大寺洞)의 사(寺)가 만나/ 인사(仁寺)라 하였으니/ 거기 가거든 반갑다고/ 인사(人事)나 하라 ​-이생진 <인사동> 전문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사동길은 종로변 남인사마당부터 안국동 로터리 북인사마당까지 불과 600미터 남짓의 길이다. 그러나 실지 인사동의 주인은 속내 깊은 골목들이다. 큰길 양 옆으로 이리저리 뻗어있는 골목길은 마치 실핏줄처럼 인사동을 누빈다. 그 총길이가 무려 20여 킬로미터. 그 길은 오랜 내력만큼이나 길고도 깊다. 하지만 골목의 역사는 동네의 기원에는 채 미치지 못한다. 인사동 골목이 생긴 것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부터. 서울이 도읍이 된 이래로 워낙 양반 동네였지만 양반들이 몰락하면서 땅을 쪼개 골목을 만들어 집을 짓고, 양반들이 내놓은 골동품을 팔면서 고서화집에 도자기집에 필방도 생기고, 어찌어찌 지금의 국가대표 ‘전통문화거리’가 되었다.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변했다지만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인 통문관을 비롯해 골동품점, 화랑, 필방, 그리고 전통 주점과 찻집이 이제껏 밀집되어 있는 곳이 인사동이다. 허나 어쩌랴. 그 전통은 ‘골동(骨董)’을 넘어 ‘박제(剝製)’가 되어버린 지 오래고, 이제 그마저도 상업과 세태에 밀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를 지경에 이르렀으니.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변했다지만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인 통문관을 비롯해 골동품점, 화랑, 필방, 그리고 전통 주점과 찻집이 이제껏 밀집되어 있는 곳이 인사동이다. 허나 어쩌랴. 그 전통은 ‘골동(骨董)’을 넘어 ‘박제(剝製)’가 되어버린 지 오래고, 이제 그마저도 상업과 세태에 밀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를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귀천(歸天)> 전문

가난했던 한 시인이 천국으로 떠났다. 조의금이 몇 백 걷혔다. 생전에 그렇게 ‘큰돈’을 만져본 적이 없는 시인의 장모는 가슴이 뛰었다. 이 큰돈을 어디다 숨길까. 퍼뜩 떠오른 것이 아궁이였다. 거기라면 도둑이 든다 해도 찾아낼 수 없을 터였다. 노인은 돈을 신문지에 잘 싸서 아궁이 깊숙이 숨기고서야 편한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시인의 아내는 하늘나라로 간 남편이 추울 거라는 생각에 그 아궁이에 불을 넣었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 푸르스름한 빛이 이상했다. 땔나무 불빛 사이로 배추 이파리 같은 것들이 팔랑거리고 있었다. -김병종 <화첩기행2> 중에서

시인은 그렇게 순전한 ‘귀천’을 완성했다. 그것은 인사동이 낳은 가장 슬프고도 아름다운 동화였다. 그가 하늘로 돌아간 지도 벌써 27년이 되었다. 나는 시인의 생전에도, 사후에도 시인의 아내가 운영하는 인사동 골목의 찻집 ‘귀천’에 들르지 못했다. 아니, 들르지 않았다. 그곳에 가면 왠지 내 삶이 누추하고 비루하게 되비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시인이여, 그곳에서는 따뜻하신가.

인사동은 2006년 매주 토·일요일마다 ‘차 없는 거리’로 지정되면서 시민과 함께하는 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소위 ‘걷기 좋은 거리’를 조성한다는 명분으로 일대의 노점상(삶)들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돌확과 화단을 설치한 ‘관제’ 과거사가 도사리고 있다. 과연 꽃보다 사람이 아름다운가.
인사동은 2006년 매주 토·일요일마다 ‘차 없는 거리’로 지정되면서 시민과 함께하는 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소위 ‘걷기 좋은 거리’를 조성한다는 명분으로 일대의 노점상(삶)들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돌확과 화단을 설치한 ‘관제’ 과거사가 도사리고 있다. 과연 꽃보다 사람이 아름다운가.

낙원상가 골목으로 들어설 때부터 무속집에서 나는 것 같은 묘한 향내가 났다. 그리고 그 유명한 낙원떡집들, 국밥집에서 설설 끓는 돼지머리고기, 그리고 그 옆이 악기전문 낙원상가다. 향내와 떡과 고기와 악기가 있는 낙원동이라. 그 품목만으로도 낙원동은 충분히 낙원이 아닐 수 없겠는데, 그러나 현실에서의 낙원동은 낙원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공선옥 <마흔에 길을 나서다> 중에서

낙원상가는 1969년 서울의 대대적인 개발계획과 맞물려 도심부 재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도로 위에 지어진 주상복합건물이다. 1970년대 종로, 광화문, 명동 일대가 문화중심지로 각광받던 시절 낙원상가 2층은 일자리를 구하려는 음악인들이 몰려 인력시장 구실을 했다. 그리고 1979년 서울시가 탑골공원 주변 건물들을 허물고 담장정비 사업을 추진할 때 인근의 악기점들이 낙원상가로 입주하면서 본격적인 악기전문상가로 발전했다. 1980년대 후반 서울올림픽 개최와 통행금지 해제로 유흥업이 성행하고 악기와 악사에 대한 수요가 증대하면서 최대의 호황을 누렸지만, 1990년대 초 심야 영업시간 단축과 유흥업소 단속으로 악사 인력시장이 위축되다가 1990년대 후반 이후 외환위기와 노래방 기계 보급에 따라 인력시장의 기능을 상실했다. 악기는 남았으되 악사는 사라진 지금의 낙원상가는 낙원인가, 아닌가.

낙원상가 1층의 악기점. 낙원상가의 상징적 공간이던 허리우드극장은 예술영화 전용관으로 잠시 운영되다가 지금은 오래된 명작들을 선별해 상영하는 실버극장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와 함께 영화 상영 중에도 시도 때도 없이 풍악소리로 쿵쾅대던 카바레가 있던 자리에는 어르신들의 사교장인 콜라텍이 들어섰다.
낙원상가 1층의 악기점. 낙원상가의 상징적 공간이던 허리우드극장은 예술영화 전용관으로 잠시 운영되다가 지금은 오래된 명작들을 선별해 상영하는 실버극장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와 함께 영화 상영 중에도 시도 때도 없이 풍악소리로 쿵쾅대던 카바레가 있던 자리에는 어르신들의 사교장인 콜라텍이 들어섰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 이번에는 익선동이 뜨고 있다. 고층빌딩 숲속, 섬 같이 자리한 익선동 한옥마을이 최근 ‘뉴트로(신복고주의)’ 열풍과 함께 서울의 새로운 ‘핫플레이스’로 주목받고 있다. 익선동은 원래 철종이 태어나고, 그 후손들이 살던 누동궁이 자리한 지역이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주로 청계천 이남에 거주하던 일본인이 종로 진출을 본격화하자, 이에 맞서 당시 ‘건축왕’으로 불리던 개발업자 정세권이 일대 토지를 사들여 대규모 한옥단지를 조성하며 마을로 변모한다. 이후 서울의 도시화가 진행되고, 특히 종로 일대에 고층빌딩이 들어서는 동안에도 익선동 한옥마을은 별다른 변화 없이 한 세기 가까이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세월은 익선동에도 어쩔 수 없는 변화를 안겨주었다. 낡고 불편한 도시한옥은 현대생활과는 맞지 않았고, 살기 힘들어진 주민들은 결국 재개발을 추진했다. 하지만 한옥 골목이라는 특성은 재개발에도 제한을 주었다. 익선동 한옥이 간직한 역사성을 외면하기 어려웠던 까닭이다. 도시정비가 지지부진하자 익선동 주민들은 10년 만인 2014년 스스로 재개발을 포기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재개발 철회가 익선동엔 오히려 기회가 되었다. 서울의 급격한 변화에도 도심에 살아남은 한옥마을이 골목과 한옥을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들에게 오히려 매력적으로 다가섰기 때문이다.
처음 재개발을 추진했던 주민들은 도시재생으로 눈을 돌렸고, 한옥을 개조한 카페, 술집 등 상업시설이 잇달아 들어서며 골목은 아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더욱이 최근의 ‘뉴트로 열풍’은 근대 한옥, 좁은 골목과 어우러지며 익선동을 새로운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게 했다. 지금의 익선동은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밀려드는 사람들로 전성기의 홍대거리를 방불케 한다. 그러나 익선동 역시 언제 ‘이 또한 지나가리라’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뿌리 깊은 전통조차 상업화의 물결에 밀려 변해버린 인사동처럼. 상업적 번성마저 시들고 낙원 아닌 낙원이 되어버린 낙원상가처럼. 밀려드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는 익선동에서 그저 반갑다고 인사만 할 수 없는 이유다.

종로3가역 4번 출구에서 좁은 골목을 따라 몇 걸음 들어가면 시간여행을 떠나온 듯한 풍경과 마주한다. 1920년대에 지은 한옥이 어깨를 맞대고 늘어선 익선동이다. 세월의 때가 묻은 골목은 이제 전혀 새로운, 트렌디한 골목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통속적인 전통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아이템과 컬러로 새롭게 채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종로3가역 4번 출구에서 좁은 골목을 따라 몇 걸음 들어가면 시간여행을 떠나온 듯한 풍경과 마주한다. 1920년대에 지은 한옥이 어깨를 맞대고 늘어선 익선동이다. 세월의 때가 묻은 골목은 이제 전혀 새로운, 트렌디한 골목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통속적인 전통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아이템과 컬러로 새롭게 채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여행작가 유성문은 길에서 길의 내력을 들춰왔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새겨왔다. 그 내력과 사연은 먼빛이 되어 다시 그를 길로 내세운다. ‘길에서 길을 묻다’(경향신문), ‘사람의 길’(주간경향) 등 오랫동안 길과 사람 이야기를 써왔다. 문학관기행 <문향을 따라가다>(어문각)를 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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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정 2020-02-04 17:30:01
초등학생 때부터 가끔씩 가던 낙원상가 결혼하고 기타 좋아하는 남편 데리고 가니 한시간을 구경하네요
익선동은 왜그렇게 사람이 많은지 카페도 줄을 서고 ㅜㅜ 두번은 가지않을 것 같아요
익선동 낙원상가 운현궁 구경. 한옥마을 경복궁 지나 시청역까지 걸었던 지난5월 어느 날 발바닥 불났던게 기억나네요~~

심강지서(위영) 2020-01-26 21:16:19
종로 2가 사거리부터 안국역까지 이르는 인사동 거리는 70 ~ 90년대까지만 해도 길거리에 한적 고서적들이 가판에 나와 있고 골동품점도 많았다.

옛날 가게들 자리에 옷집이나 악세서리, 음식점, 찻집 등을 파는 가게들이 들어 섰다. 고서점이야 서지학의 대가였던 이겸로 옹이 개점한 통문관이 유일하게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손자가 가업을 있고 있으나 지나가다 보면 개점 휴업처럼 손님도 한 분 없다. 그나마 인터넷으로 장사를 하는 것 같다.

낙원상가도 악기점들과 떡집들이 많이 없어졌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상가들도 신속하게 급변하는 것 같다.
오래된 음식점들이 명맥을 유지하여 모임이나 손님을 만날 때 인사동에 가 보면 외국인들이 많이 와서 다행이다. 외국인에게 감동주는 거리가 되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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