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서성이던 젊음은 누구였던가
거기 서성이던 젊음은 누구였던가
  • 유성문(먼빛)
  • 승인 2020.03.20 12:4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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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춘선숲길과 태릉

#1. 화랑대
막내 동생은 대전 한 고등학교의 동문 후배이기도 했다. 거두어 먹이기 바쁜 7남매의 막둥이인지라 공부에는 별 기대 없이 그저 건강이나 했으면 하는 천덕꾸러기 신세이기도 했고. 그런데 맨날 공이나 차고 다니던 아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달라졌다. 내 은사들이 ‘누구 동생’이란 이유로 관심을 가져주었던 모양이고, 이제껏 주변 관심 밖에만 있던 막내는 그를 자신에 대한 기대라고 여겼는지 갑자기 ‘열공 모드’로 돌아섰으며, 기어이 우리 형제 누구도 받아보지 못한 장학금이란 걸 타내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육사에 들어갔다. 그때는 모두들 그랬다. 공부는 좀 하지만 가난한 아이들에게 육사는 ‘입신양명이자 효도의 길’이라고 치부했다.
입교 후 화랑대로 첫 면회를 갔던 날, 막내는 다른 사람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나를 이끌더니 바닥에 주저앉아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아차, 싶었다. 그때야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막내는 소위 ‘육사 체질’은 아니었다. 그래, 그때라도 말려야 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동안의 무관심을 뼈저려하면서도 그저 ‘우는 아이 달래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겠는가. 막상 눈앞의 어려움보다는 주변 기대를 배신하는 것이 더 두려웠던 착한 막내는 어찌어찌 학교를 마치고 임관했다. 그리고 남도의 한 야전부대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막내는 불의의 사고로 제 모교에서 멀지 않은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왼쪽/육군사관학교 입구의 기마화랑상. 노원구 공릉동의 육군사관학교는 흔히 ‘화랑대’로 불린다. 1946년 태릉의 ‘군사영어학교’를 모태로 개교한 ‘조선경비사관학교’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육군사관학교’로 개칭되었고, 한국전쟁 중 잠시 진해에 위치해 있다가 휴전 이듬해인 1954년 태릉으로 복귀했다. 1957년 화랑 후예의 기상을 닦는 국방의 요람지로서 발전하려는 여망을 담아 ‘화랑대’라는 별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오른쪽/육군사관학교 교훈탑. 정면에 새겨진 ‘지(智)·인(仁)·용(勇)’ 휘호는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전쟁 중 진해에서 재개교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하사했다. 육군사관학교는 개교 50주년을 계기로 '국민과 함께하는 육사'의 이미지를 부여하고 대군신뢰를 증진하기 위해 1997년부터 학교를 개방하고 있지만 현재는 ‘코로나19’로 인해 출입이 어렵다.
왼쪽/육군사관학교 입구의 기마화랑상. 노원구 공릉동의 육군사관학교는 흔히 ‘화랑대’로 불린다. 1946년 태릉의 ‘군사영어학교’를 모태로 개교한 ‘조선경비사관학교’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육군사관학교’로 개칭되었고, 한국전쟁 중 잠시 진해에 위치해 있다가 휴전 이듬해인 1954년 태릉으로 복귀했다. 1957년 화랑 후예의 기상을 닦는 국방의 요람지로서 발전하려는 여망을 담아 ‘화랑대’라는 별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오른쪽/육군사관학교 교훈탑. 정면에 새겨진 ‘지(智)·인(仁)·용(勇)’ 휘호는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전쟁 중 진해에서 재개교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하사했다. 육군사관학교는 개교 50주년을 계기로 '국민과 함께하는 육사'의 이미지를 부여하고 대군신뢰를 증진하기 위해 1997년부터 학교를 개방하고 있지만 현재는 ‘코로나19’로 인해 출입이 어렵다.

#2. 경춘선숲길
방황하는 젊음은 대성리나 남이섬, 강촌쯤에서 잠시 청춘 본연의 모습을 되찾곤 했다. 어슴푸레한 새벽녘, 삼삼오오 청량리역으로 모여든 젊음들은 조금은 어색하고 멋쩍게 경춘선 열차에 올라탔다. 행색이라고 해봐야 야전점퍼에 워커, 한쪽 손엔 알코올버너와 코펠 따위가 들어있는 덜렁거리는 캠핑백, 다른 한 손엔 잘해야 야외용 컨버터블. 발산해야 할 젊음도 그리 많지 않건만 설렘 속에 기차는 덜컹거리며 떠나갔고, 이윽고 작은 시골역 한켠에 우리는 부려졌다. 역사 밖으로 나서면 아침햇살에 반짝이는 미루나무 이파리들, 그리고 막막함. 거기 서성이던 젊음의 얼굴은 누구였던가. 그때 젊음의 노트에 적은 낙서들은 시였던가, 노래였던가.
지난 2013년 첫 삽을 뜬 ‘경춘선숲길’이 2019년 5월 완전 개통되었다. 월계동과 공릉동을 잇는 경춘철교에서 시작해 구리시 경계까지 총 6km. 과거 노원구 성동역과 춘천 사이에서 청춘의 추억을 실어 나르던 구간이다. 2010년 복선전철이 개통되어 ITX-청춘열차로 운행되면서 기차가 다니지 않는 폐선부지가 되었으나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다시 태어났다. 공덕제2철도건널목~육사삼거리의 1단계 구역에는 허름한 주택에서 분위기 있는 공간으로 변신한 카페들이 자리하고, 경춘철교~서울과학기술대 입구의 2단계 구간은 시민이 직접 가꾼 꽃밭과 다양한 수목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정원길이며, 육사삼거리~구리시 경계의 3단계 구간은 옛 화랑대역을 끼고 있는 한적하면서도 옛 추억을 떠올리기에 그만인 산책길이다.

서울의 마지막 간이역이자 등록문화재 제300호로 지정되어 있는 옛 화랑대역이 낭만을 가득 담은 추억의 공간으로 거듭났다. 1950년대의 미카형 증기기관차와 협궤열차, 그리고 체코와 일본의 노면전차 실물 등을 역사 주변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옛 화랑대역은 1939년 경춘선 개통과 함께 ‘태릉역’으로 영업을 시작하였으며, 1957년 인접한 육군사관학교가 ‘화랑대’로 불리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서울의 마지막 간이역이자 등록문화재 제300호로 지정되어 있는 옛 화랑대역이 낭만을 가득 담은 추억의 공간으로 거듭났다. 1950년대의 미카형 증기기관차와 협궤열차, 그리고 체코와 일본의 노면전차 실물 등을 역사 주변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옛 화랑대역은 1939년 경춘선 개통과 함께 ‘태릉역’으로 영업을 시작하였으며, 1957년 인접한 육군사관학교가 ‘화랑대’로 불리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3. 태릉갈비
‘태릉갈비’, ‘홍릉갈비’ 등등 왜 유독 왕릉 주변의 갈비집들이 유명할까. ‘농자천하지대본’이라, 농업을 중시하던 조선에서는 사람과 함께 농사일을 하는 소를 함부로 하지 못했다. 자신의 재산이어도 나라의 허락 없이는 절대로 잡아먹지 못했으며, 도축되는 소는 당연히 허가를 받고서야 가능했다. 하지만 허가 없이 소를 잡는 경우가 있었는데, 바로 능제를 지내는 경우였다. 능제 음식으로 소고기가 쓰였고, 덕분에 왕릉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드물게 소고기 맛을 볼 수 있었다. 소고기 맛을 보게 되자 좀 더 맛있게 먹는 법을 알게 되고, 능제를 둘러싼 왕릉 주변의 소고기 맛이 유명해지면서 능 이름을 내건 갈비집이 하나둘씩 생겨나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란다.
1970년대 전까지 태릉 근처에 갈비집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부터 일대에 배나무를 많이 심어 봄이면 꽃놀이 인파면 몰렸다고 하니 근처에 고기를 구워 파는 집들은 더러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970년대 초 태릉에 ‘푸른동산’이라는 놀이공원이 생기면서 사정이 바뀌었다. 국제사격장을 중심으로 동물원·수영장·보트장·눈썰매장 등이 들어서면서 사철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와 함께 그들을 대상으로 한 갈비집들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배농장들에서는 배나무 아래에 상을 차리고 갈비를 구워 팔았다. 하지만 1990년대에 들어 태릉 일대에 개발바람이 불면서 서울여대 근처에 있던 갈비촌은 헐렸고 배나무들도 베어졌다. 이제 봄이면 배꽃 아래 갈비를 뜯던 풍경도 ‘태릉갈비의 추억’으로만 남았다.

왼쪽/옛 태릉푸른동산 입구의 소나무숲. 서울시민의 산책로로서 사랑을 받던 푸른동산(후에 이스턴캐슬)은 현재 한국사격진흥회와의 명도 문제로 운영하지 않고 있다. 봄을 맞은 소나무숲은 다시 푸르러지건만. 오른쪽/태릉은 조선 중중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의 능으로, 어린 나이에 즉위한 명종의 뒤에서 8년간 수렴청정하며 권력을 틀어쥔 여걸답게 묘역과 석물들이 웅장하고 대담하다. 인근의 강릉(명종과 그의 비인 인순왕후의 능)이 오히려 소박하고 조촐하게 느껴질 정도로.
왼쪽/옛 태릉푸른동산 입구의 소나무숲. 서울시민의 산책로로서 사랑을 받던 푸른동산(후에 이스턴캐슬)은 현재 한국사격진흥회와의 명도 문제로 운영하지 않고 있다. 봄을 맞은 소나무숲은 다시 푸르러지건만. 오른쪽/태릉은 조선 중중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의 능으로, 어린 나이에 즉위한 명종의 뒤에서 8년간 수렴청정하며 권력을 틀어쥔 여걸답게 묘역과 석물들이 웅장하고 대담하다. 인근의 강릉(명종과 그의 비인 인순왕후의 능)이 오히려 소박하고 조촐하게 느껴질 정도로.

여행작가 유성문은 길에서 길의 내력을 들춰왔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새겨왔다. 그 내력과 사연은 먼빛이 되어 다시 그를 길로 내세운다. ‘길에서 길을 묻다’(경향신문), ‘사람의 길’(주간경향) 등 오랫동안 길과 사람 이야기를 써왔다. 문학관기행 <문향을 따라가다>(어문각)를 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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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강지서(위영) 2020-03-20 18:35:14
석문 작가가 가족사의 아픈 부분을 올려 주었구나...아까운 동생을 잃었네... 무슨 사고인지 모르지만 순직을 했으니 대전 현충원에 갈 수 있을 것이나 죽어서 어디를 가건 무슨 소용인가........앝타까움과 위로의 말을 전합니다.

솔직히 월계동, 공릉동, 태릉등은 가 보지 안아서 글을 읽어도 풍경이 다가 오지 않는다. 그러가 보다 한다.
다만 경춘선이나 경원선이 폐지된 구간을 공원으로 만든 것은 아주 잘한 정책이다.
용산이나 마포 주위에도 경원선 공원이 조성되어 보기 좋다.

태릉갈비, 홍릉갈비, 벽제갈비는 서울 사람들이 산업화 이후인 1990년대에 와서 활성화된 갈비집으로 추정된다. 요즘음 대중화된 모든 음식이 1990년 이후에나 생긴 것이 많다.

어려서 삼결살이나 갈비, 불고기를 어찌 먹어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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