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하기 어려운 기술제휴

정부가 추진하는 한국판 '그린 뉴딜' 정책이 베일을 벗은 가운데 이른바 'K배터리 동맹'이 재계의 화두로 급부상했다. 하지만 세계시장에서 사활을 걸고 경쟁해야 하는 기업들이 제휴해서 함께 움직인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국내 4대그룹 총수들의 회동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이 국내 배터리 3사와 회동을 마쳤다. 정의선 부회장은 5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6월 구광모 LG그룹 회장, 7월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만났다 연결고리는 모두 전기차 배터리였다. LG와 삼성, SK그룹이 모두 참여하고 있는 전기차 배터리 시장이다. 현대차그룹과 국내 배터리 3사의 이 같은 흐름을 두고 ‘K배터리 동맹’이란 표현까지 등장했다. 전기차와 배터리 사업체들이 협력해 국가경쟁력을 키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서로 다른 입장
업계의 반응은 좀 다르다. 연속으로 만났다고 해서 경쟁사인 배터리 업체들이 손을 잡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동맹이라는 표현부터 현대자동차 관점을 반영한다. 배터리 3사는 경쟁 관계에 있는 역학 구조상 ‘동맹’이란 말이 성립되기 이렵다.

사실 현대차그룹과 배터리 3사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 현대차그룹에서는 전기차 생산을 위해 국내 배터리 3사의 협력이 필요하다. 현대차 입장에서는 현재 거래하는 LG화학·SK이노베이션 등과 협력을 강화하고 삼성과도 협력할 가능성을 내비치는 등의 노력을 통해 공급사들 간 경쟁을 유발하고, 이를 바탕으로 배터리 공급가격을 낮추는 것이 최선이다. 오히려 배터리 업체들 간의 연대는 불편하다. 반면 배터리 3사 입장에서는 경쟁관계일 뿐이다.

당연하지만 정부의 입장은 또 다르다. 지난해 11월 산업통상자원부는 LG화학·삼성SDI·SK이노베이션 등과 함께 1000억원대 규모의 ‘차세대 배터리 펀드 결성과 공동 연구개발(R&D) 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현대차와 배터리 3사의 협력이 그린뉴딜과 맞물린다면 일자리 창출은 물론 얼어붙은 국내 경제에 활력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전기차
현대차는 사실 전기차 출발이 늦었다. 수소차를 앞세우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SNE리서치가 올해 1~4월 글로벌 전기차 브랜드를 조사한 결과를 보면 현대차 1만8000대로 글로벌 전기차 공급 순위 5위, 기아는 1만1000대로 10위를 기록하고 있다. 테슬라가 10만1000대로 압도적 1위이다.

현대차와 기아차를 모두 합쳐도 4위수준이다, 1~3위는 테슬라, 르노-닛산 얼라이언스, 폭스바겐그룹 등이 차지했다. 그런데도 지금 현대차는 전기차와 수소차 모두 잘하려 하고 있다. 현대차는 2025년까지 수소전기차 연간 판매량을 11만 대로 늘리고 2030년까지 연간 50만대 규모의 수소전기차 생산체계를 구축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현대·기아차는 2025년까지 친환경차 44종을 내놓으면서 이 중 23종을 순수 전기차로 출시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가 만들 예정인 23종의 전기차마다 특징 있는 국내 업체의 기술력을 도입한다면 그만큼 경쟁력은 더 높아질 것이다. 배터리 공급선을 다변화하는 움직임은 이미 완성차 업계의 트렌드다. 특정 배터리 업체와 합작사를 설립하더라도 복수의 배터리 공급망만큼은 유지한다. 현대차 그룹이 LG화학 외에 SK이노베이션, 나아가 삼성SDI와도 공급 계약을 맺는 등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는 것은 안정적인 수급 조절을 위한 조치다.

전기차 배터리 시장
배터리는 전기차의 핵심 부품이다. 내연차로 따지면 엔진에 해당한다. 가격도 전기차 원가의 40%를 차지한다. 세계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서 우리나라기업들이 가진 경쟁력은 매우 높다. SNE리서치 자료를 보면 올해 1~5월 전 세계 배터리업체 점유율은 LG화학 24.2%로 1위, 삼성SDI가 6.4%로 4위, SK이노베이션이 4.1%로 7위를, 차지한다.

중국의 CATL은 22.3%로 2위, 파나소닉은 21.4%로 3위를 차지했다. LG화학이 선두지만 한국, 중국, 일본 업체들이 치열하게 주도권 경쟁을 벌이는 셈이다. 국내 배터리 3사가 가진 경쟁력은 조금씩 다르다. LG화학은 리튬-황 배터리 경쟁력이 뛰어나다. 삼성SDI는 차세대 전기차용 전지인 ‘전고체 배터리(All-Solid-State Battery)’기술개발에 앞서 있다.

SK이노베이션은 고에너지 밀도, 급속충전, 리튬-메탈 배터리 등 차세대 기술과 관련한 기술력이 있다. 하지만 배터리 3사는 풀어야 할 숙제도 있다. 국내 배터리 3사는 기술개발과 국내 공장 증설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 세계시장 점유율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다지만 우리나라 배터리업체는 국내에 큰 공장이 없다. 국내 공장은 규모가 해외와 비교하면 작다.

LG화학(오창공장)이 연간 10GWh, SK이노베이션(서산공장) 4.7GWh, 삼성SDI(울산공장) 4GWh 정도로 알려져 있다. 배터리 3사 전체 국내 공장에서 생산능력이 약 20GWh 정도이다. 반면 LG화학 폴란드 공장은 15GWh로 대규모 생산 체제를 갖추고 있다. 연간 10GWh 규모면 순수 전기차 15만대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다.

치열한 경쟁 무대
전기차 배터리는 현재 초기 반도체 시장과 비슷한 양상을 띤다. 글로벌 배터리 시장은 올해를 기점으로 오는 2030년까지 급속도로 성장할 것으로 예측되는 분야다. 2030년까지 현재의 9배까지 시장이 커질 것으로 진단된다. 시장의 급격한 확대가 예상되는만큼 현재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국내 반도체 시장의 버팀목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손잡지 않는 것처럼 국내 배터리 업계도 국경 없는 국제무대에서 치열하게 경쟁해야 할 업체들일 뿐이다. 당장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은 현재 기밀유출·특허침해 등의 이슈를 놓고 한·미 양국 법정에서 치열한 소송전을 전개 중이다.

지난달 LG화학은 한국과 미국에서 지적재산권 침해 등으로 첨예한 대립관계를 이어 온 SK이노베이션을 상대로 검찰에 산업기술보호법‧부정경쟁방지법 등의 위반행위로 고소했다. 이미 지난해 LG화학은 SK이노베이션을 경찰에 고발한 바 있다. 1년여 만에 검찰에 재차 고소한 셈이다. 그간 양사는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법적공방을 이어왔다. 지난 2월 국제무역위원회(ITC)는 SK이노베이션의 조기패소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오는 10월 최종판정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여전한 갈등
오는 10월로 예고된 ITC의 판결에서 SK이노베이션이 패소할 경우 배터리 사업에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된다. SK이노베이션은 이미 현지에 수조원대 투자를 단행했지만 패소할 경우 사업에 막대한 차질이 불가피하다. 일각에서 배터리 동맹을 얘기하는 가운데서도 소송을 제기한 것은 갈등이 여전하다는 의미외에 달리 보기어렵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은 지난 14일 청와대가 개최한 '한국판 뉴딜 국민 보고대회'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배터리 3사가 한국 기업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서로 잘 협력해 세계 시장 경쟁에서 앞서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LG화학과 삼성SDI, SK이노베이션은 지금도 세계 전기차 시장에서 치열한 수주 경쟁을 벌이고 있다.

당장 현대차가 내년부터 양산하는 전기차 전용 플랫폼의 1차 배터리 물량은 SK이노베이션이 수주했고, 2차 공급사는 LG화학으로 결정됐다. 기술력이 생명인 산업에서 배터리 3사가 연구 역량을 결집해 협력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사업은 올림픽이나 월드컵과 같은 국가대항전이 아니다. 세계 시장을 놓고 기업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른바 K배터리 동맹은 실현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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