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차산업혁명’ 너머 ‘인문’의 길을 묻다

▲ 박경만 한서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

‘과연 황홀한 미래가 손짓하는가?’-. MIT의 에릭 브리뇰프슨, 앤드루 맥아피 같은 4차산업혁명 전도사들에게 언론인 마틴 울프는 그렇게 되물었다. 19C~20C의 기시감(旣視感)을 들어 이들 기술낙관론자들에 반박하길 “너무 흥분하지 말라”고 했다. 전기가 인류에게 암흑과 밤을 걷어내고, 자동차가 말을 사라지게 했던 그 시절은 지금 ‘4차’의 충격보다 더하지 않았겠냐는 거다. 과거를 재구성한 혁신일뿐 섣불리 황홀한 미래의 서막이라며 들뜰 필요가 있냐는 얘기다.

영국 <글로브>지는 한 술 더 떴다. 4차산업혁명 담론의 원조인 클라우스 슈밥의 언설(言舌)을 “멍청하고 허황된 소리”로 몰아부쳤다. 수 백 년 전승되고 축적된 과학기술의 응용을 극단적으로 묘사한 말장난쯤으로 본 것이다.

어찌됐든 ‘4차산업혁명’이란 말은 이제 생활인에게도 익숙한 첨단용어가 되었다. 시중의 베스트셀러 도서 제목처럼, 장삼이사의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의 언어가 된 것이다.
그래서 너나 할 것없이 한 마디씩 거들곤 한다. 디지털과 물리학, 생물학의 경계를 허문 것이라느니, 실제와 가상세계의 융합이라는 둥…. 좀 안다고 하는 이들은 인공지능, 로봇, 자율자동차, 합성생물학, 3D프린팅, 우생학적 생체공학, 나노공학 등등을 꿴다.

그런 말미에 식자층은 또 인류의 미래를 두고 짐짓 걱정하며, 악담같은 덕담을 쏟아내곤 한다. 노동의 축소와 직장의 소멸을 근심하고, 자본마저 디지털화하며 너무 흔해진 탓에 그 종말을 맞을 것이라고 한다. 고도의 알고리즘에 의한 강력한 인공지능을 예견하며, 자칫 도덕과 철학이 결여된 공학적 이성만 지배하는 로봇 디스토피아의 재앙도 걱정한다.

덕분에 장밋빛과 회색이 교차하는 온갖 책자들이 홍수를 이루며, 날개돋힌 듯 팔려나가는게 요즘 서점가의 풍경이다. 정작 ‘혁명’이 오기도 전에 이미 관념 속 ‘4차’가 시작된 듯 싶다.

하면 그런 미래가 오긴 올 것인가? 인간을 뛰어넘는 기계에 인간의 행복을 의탁하는 시대가 확실히 올 것인가? 앞서 마틴 울프가 고백했듯, “잘 모르겠다”는게 문제다. 심지어 슈밥의 속마음마저 “그렇다”가 아니라 “그럴 것”이라며 긴가민가해 한다. 관련 석학들이 ‘4차’의 조감도를 중구난방으로 공급하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갈팡지팡 ‘4차’의 막연한 이데아만 소비하느라 바쁘다.

슈밥에 대한 <글로브>의 막말 수준의 비판이나, 울프 같은 신중론자의 회의론을 단순히 문명의 전진에 대한 어깃장으로만 볼 수만은 없는 이유다.
그렇다면 지금 ‘4차’를 둘러싼 온갖 감언과 이설이 겨냥해야 될 과녁은 따로 있다. 왜 다들 ‘4차’를 자꾸 얘기하나? 그런 담론의 속내는 뭔가? 그 함의를 캐내보고, 그 행간에 필히 담겨야 할 키워드를 거꾸로 복원해보는 것이다.

예컨대 AI와 일자리 축소, 그 하나만 거꾸로 톺아보자. 먼저 ‘일’이란 뭔가? 데이비드 프레인의 ‘일하지 않을 권리’, ‘게으를 권리’까지 비약하진 않더라도, 유급노동의 노예가 아닌, 세상의 감각적 체험을 한껏 자율적으로 즐길 수 있는 권리의 회복이 ‘일’ 말고도 가능할 것인가. ‘일’ 말고도 창조적 인간 역량을 충분히 인식할 권리, 곧 의, 식, 주를 초월한 제 4의 삶을 획득할 수 있는가. 그런 물음이 ‘4차’의 함의에서 빠져선 안 된다.

일자리가 대폭 사라지면 어떡하나? 그런 선제적 우려에 대해서도 비선형(非線型)의 인문학적 태도의 본질적 검증이 가해질 수 있다.

경제학자 바실리 레옹티프는 “일백 수 십 년 전 자동차와 기차 때문에 말(馬)과 마부가 종적을 감췄듯, 인간 육신과 얽힌 이런저런 직업이 사라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허나 말과 사람은 다르다. 진화와 행복 지속에 대한 인간의 욕구, 인간 존재와 관계에서 비롯된 동기 부여, 유대감, 표현 욕구 등등 ‘말’과 달리 인간만의 본성이 있다. 호모사피엔스, 그들만의 우주적 욕구 앞에선 ‘일’의 양과 질도 언제나 가변적이다. 그런 이유로 사회가 만들 수 있는 일자리는 딱 그만큼 정해져 있다는 노동총량불변의 법칙도 믿을 게 못된다. 역시 ‘4차’ 담론에 가해져야 할 질문이다.

그래서다. ‘오버’하지 말자. ‘4차산업혁명’을 뉘집 강아지 이름 부르듯 하기에 앞서, 그 행간에 깃들어야 할 깊은 열쇳말부터 소환해야 할 것이다. 공유나 융합, 소유와 존재, 평등과 불평등, 공감과 연대, 민주와 공리, 개인, 공동체, 연결과 단절 등등이다. 곧 인류세의 주역인 인간의 항구적 조건에 다름 아닌 것들이다.

항구적 인간 조건은 다시 “인간, 넌 누구냐?”라는 실존적 질문과 맞닿는다.

그렇다면 이런 문답이 가능하다. 창백한 순수(purity)에 대한 숭배, 혹은 ‘같지 않음’에 대한 배제와 혐오를 어찌할 것인가? 한나 아렌트 말마따나 서로 다른 수많은 개인과 개인들의 화학적 섞임과 용납, 곧 ‘복수’(複數, plurality)의 숭배로 이에 맞서면 될까? ‘표준화’로 정화하기보단, 비균질적 삶들의 공존이 되어야 하고, 계몽된 의심을 바탕으로 한 분산과 개방이 전제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Q&A를 통해 비로소 ‘융합’을 떠올리고, 넉넉한 ‘공유’의 공간을 생각할 것이다. 상한선이 없는 평등과, 소유와 존재의 불균형을 ‘4차’와 결부시킬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와 개인의 교집합을 주목하게 되고, 인간행복의 충분조건을 ‘4차’와 연결지을 수 있게 된다. ‘4차’론자들이 말하는, 기계와 인간성이 합성된 트랜스휴머니즘도 비로소 새로운 휴머니즘으로 진화할 것이며, ‘산업혁명’이란 이름하에 인간이 실존적으로 멸시당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신과 같은 능력을 갖춘 인간, 호모데우스를 향한 염원도 다시금 숙고해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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