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경만 한서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

글품으로 먹고사는 글쟁이도 필경 없어지려나? 기술낙관론의 두뇌역할을 하는 옥스포드 마티 스쿨은 “10년 후엔 사람 대신 자동화 내러티브 프로그램이 기사나 뉴스의 90%”를 써댈 거라고 했다. 글쟁이로선 은근히 신경이 쓰일 법도 하다. 이들 연구는 또 20년 내로 현존하는 직업의 절반이 자동화되면서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미래학계도 일자리와 노동의 소멸을 예견하며, 특단의 인류적 대안을 걱정하곤 한다.

과연 그럴까? 가보지 않은 길이라서 아니라고 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4차산업혁명 사조(思潮)에 들뜬 요즘 세태 따라 막연히 수긍만 하는 것도 찜찜하다. 다만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있다. 일과 사람의 함수는 그렇게 딱 잘라 얘기하기엔 너무나 유기적이며, 그 어떤 자연의 종속변수보다 복잡한 비선형(非線型)의 경우의 수가 작동한다는 점이다.

4차산업혁명가들 간에도 비슷한 예측이 있다. ‘4차’의 프로파간다를 맨 처음 내건 세계경제포럼은 “명확하게 정의된 업무, 계량화가 가능한 업무일수록 알고리즘 설계가 용이하다”고 했다. 자동화 기계나 인공지능이 그런 작업을 수월하게 인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포럼은 또 덧붙이길 “육체적 능력이나 콘텐츠 기술보다, 복잡한 문제 해결능력, 사회적 기술, 시스템 기술의 보유자만 살아남는다”고 했다.

그 말대로라면 답이 보인다. 인간사의 복잡한 문제를 통찰하고 사회적으로 조율하는 지혜가 그것이다. 이는 다시 인문학적 알고리즘의 연마와 디지털 만능에 대한 성찰이 필수다. 그것은 ‘노동자 없는 노동’을 뒤바꾸는 단서가 될 수 있다. ‘4차’의 빛과 그림자에 관한 온갖 예언과 정언이 난무할수록, 초연결의 커넥토피아에 대한 교정과 퇴고(推敲)를 함께 얘기해야 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은 거꾸로 간다. 갈수록 우린 인스턴트 메시지로 깊이있는 의사소통을 죽이고 있다. T.S 엘리엇이 말했듯, 정보과잉 속에서 지식을 씹을 수 있는 어금니가 날로 허약해지고 있다. 비록 페인팅 모션이긴 했지만, MS사조차 ‘정보과잉 연구그룹’을 설립했을 만큼 디지털 세상은 혼란하다. 클릭과 엄지로 규합된 디지털 군중 속 외로움에 시달리다 보니, 진정한 고독을 느낄 겨를도, 참된 인문적 사유를 단련할 틈도 없다.

네트워크에선 과잉접속으로 난삽한 주절거림만 어지럽게 소비될뿐, 낯선 경험과 경청할 만한 ‘타자’는 철저하게 차단된다. 그래갖곤 ‘4차’의 전성기가 현실로 나타날때 더 이상 새로운 경험은 확장되지 않고, 언감생심 ‘창조’는 불가능하다. 문제해결능력이나 사회적 기술 따윈 사장되고 말 것이다.

오죽하면 구글의 최고 경영자 에릭 슈미트마저 일갈했을까. “주위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라! 젊은이여 컴퓨터를 꺼라!”고….

디지털 시티즌은 이제 결단해야 한다. 때론 디지털 성벽 바깥에 나가자. 디지털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산책하며, 또 다른 경험의 본질을 만나러 나가자. 멀티태스킹의 웹에서 벗어나서 종이책의 호젓함을 한껏 들이마시는 것도 좋다. 그러면 진정한 고독 속의 풍요로운 상상이 샘솟고, 가상의 디지털 삶을 통해 얻고자 했던 현실의 아이디어가 눈앞에 보인다. 디지로그의 융합을 통한 뉴프런티어십의 영감을 선사받을 수도 있다.

원통형 축음기를 내놓은 에디슨은 자신의 발명품을 그저 기계와 기술로 보았다. 반면에 원반형 음반을 발명한 베를리너는 문화적 도구이자, 인간 영혼을 즐겁게 해주는 예술적 수단으로 삼았다. 결과는 에디슨의 판정패였다. 에디슨은 축음기가 인류를 풍요롭게 해줄 미래의 소리를 담을 줄은 몰랐다. 결국 베를리너 것은 오늘날까지 인류문화사의 요긴한 도구가 되고 있다. 정작 베를리너의 본업은 시인이었다.

지금은 이미 익숙한 공유경제, 휴먼 클라우드를 보자. 이들은 아는 것에 대한 재확인의 결과가 아니라, 몰랐던 질서에 대한 질문과 낯선 경험의 확장으로 출현한 것이다. 푸코가 말한 바, “삶을 개선하고 변화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철학적 도구인 ‘자기의 기술’”덕분이다. 디지털세상에서 자기를 지키는 새로운 기술 덕에 그들은 3차산업혁명 후반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일과 사람’들로 등극한 것이다.

우버 드라이버, 에어비앤비 호스트, 인스타 카드, 심부름업체 태스크 래빗 등이 모두 그런 것들이다. 엉뚱한 공상과 망상, 그것이 모인 상상의 구체화에 다름 아니다. 그건 네트워크에서만 맴돌아선 결코 불가능한 것들이며, IoT, AI, 로봇, 자율자동화 따위와도 별개다. 그 보단 자연수 바깥에서 0을 찾고, 무리수와 허수를 발견한 것과도 같은 창조적 탐사의 결과다.

그렇다. 인문학적 알고리즘이야말로 미래형 노동의 본질에 맞는 매뉴얼이다. 이는 인간과 기계의 대립구도가 아니라, 기계와 화합하면서 수단으로 부릴 인간성의 재발견이다. 디지털 홍수에 프로그래밍된 우리의 뇌를 정화하고, 태고적 사유와 감정, 의식, 마음을 담금질하는 것이며, 속도보다 깊이를 앞세우고 ‘유레카’의 창발적 순간을 낳는 문법이다.

‘4차’의 수준높은 키워드는 또한 ‘큰 자유’다. 커넥토피아 아닌 디스커넥토피아의 성벽을  탈출하여, 인간 소외를 극복하는 역발상의 자유다. 정보(情報)의 본질인 인간세의 ‘정(情)’과, 통신(通信)이 함의한 ‘믿음(信)’을 신뢰하며 소통하는 기술이 그 무기다. 그럴 때 4차산업혁명은 혁명이 아닌 문명이 되고, 그에 필요한 일과 사람의 총량도 크게 늘어날 것이다. 문명의 주체가 된 개인 한 사람 한 사람마다 1인 기업이 되고, 지구촌 경제 인구가 곧 일자리의 숫자가 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다가올 변혁에 걸맞은 새로운 사회계약의 강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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