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시선으로 본 제4차산업혁명-‘화폐의 대전환’(6-4)

▲ 박경만 교수(한서대 문예창작학부)

‘대안화폐’의 꿈과 현실

‘돈’ 없는 세상이 가능한가? 과연 정부나 중앙은행이 발권한 법정화폐만이 돈인가? 이런 질문을 배경으로 화폐종말론이 등장하는가 하면, 대안화폐 담론도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금융위기에서 보듯 ‘법화’(法貨)를 불합리한 가치 왜곡과 폭력적 자원배분의 원흉으로 보는 진영에서 특히 그러하다. SNS나 이베이, 아마존 등 웹기반 거래 플랫폼도 이런 논의를 부추기는데 한 몫 한다. SNS 등은 분명 제도권 밖의 사회적 매체, 혹은 임의의 대중적 유통네트워크다. “그렇다면 역시 제도권 밖의, 그러나 만인에게 통용되는 지불과 거래 도구도 웹기반에서 가능하다”는 발상도 유효하게 된다.

대안화폐 운동가들은 그래서 웹 세상의 공백을 파고드는 질문을 한다. ‘웹기반 지불 시스템은 어떤가?’, ‘웹상의 (화폐로서) 가치척도는 어떤가?’ 오늘의 블록체인과 암호화폐에서 발견되는 화폐로서의 가능성과도 맞닿는 사고다. 사실 페이팔과 같은 웹기반 신용거래 시스템이 지금도 있긴 하다. 그러나 이는 은행에서 만든 부채 통화인 기존 통화만 용인한다는 점에서 대안화폐라곤 할 수 없다. 대화화폐론자들 주장처럼 중앙은행이나 정부의 정책에 따라 실물을 대변하지 못하는 명목가치를 지닐 뿐이다. 가치척도로서 불안정하며,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셈이다.

웹기반 거래 플랫폼의 대안화폐는 일단 정치적 화폐, 즉 지금의 현금을 사용하지 않는 지불수단이다. 국가화폐 단위로부터 독립된 계산 단위를 제공하는 구체적, 객관적, 보편적인 가치척도다. 가장 유력하게 언급되는 건 현금이 없는 직접적인 신용청산이다. 그렇다고 금본위제처럼 과거로 돌아간다는 뜻은 아니다. 인류가 만든 가장 발전된 화폐제도인 신용화폐의 왜곡된 부분을 제거해 완전한 웹기반의 화폐로 만드는 것이다. 대안화폐 전문가 토머스 그레코는 그 본보기로서 상호신용청산조합이란 아이디어를 내놓고 그 약관까지 마련했다.

물론 웹기반 거래 플랫폼에 의한 대안 화폐가 화폐로서 제 몫을 하려면 일정한 필요충분조건을 갖춰야 한다. 일단 인터넷이란 사이버 공간에서 상품과 서비스가 원활하게 거래되도록 매개해야 한다. 또한 중요한 것은 ‘신뢰’다. 사회적 네트워크상의 사이버 행동을 통해 평판이 형성되고 서로 신뢰하는 관계망이 필요하다. 그래서 다양한 수준의 공동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인터넷은 비인격적인 매개체임에도 불구하고, 사이버 영역의 인격적 관계가 만들어져야 한다. 소스코드(암호)를 통해 거래의 신뢰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블록체인이 그것과 가깝다.

그렇다고 대안화폐가 필요와 욕구가 일대일로 맞바꿔지는 물물교환 수준에 그쳐선 안 된다. 다양한 상품과 서비스, 계약의 가치를 비교하고, 교환이 가능하게 해야 한다. 역시 대안화폐론자인 랠프 보르소디는 그런 가치척도가 될 만한 30가지 기준상품을 제안한 바 있다. 기준상품 목록, 즉 ‘마켓 바스켓’에 들어갈 상품은 그 조건이 까다롭다. 이에 따르면 거래가 자유롭고 거래량이 많아야 하며, 필수적 상품이어야 한다. 가격이 안정적이며, 품질이 표준화된 균질성 상품이어야 한다. 보르소디는 다시 상품별로 그 경제적 중요성이나, ‘바스켓’ 목록에서 갖는 비중에 따른 가중치 등을 계량화한 다음 각기 현행의 법정화폐로 매겨진 기준(가치) 단위를 부여했다. 이들 기준이 된 상품들이 활발히 거래되기만 하면 가치 측정의 기준으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대안화폐론자들의 아이디어는 아직은 가설이며, 대안일 뿐이다. 그들 스스로도 이를 인정한다. 그럼에도 대안화폐론, 화폐종말론을 활발히 작동케 하는 것은 정치적 통화체제의 불구 때문이다. 교환 매개체인 화폐가 정치화되어 권력의 집중, 부의 불평등을 가져왔으며, 소수 엘리뜨에 의한 돈의 순환 장애가 반복되고 있다. 수단에 지나지 않는 화폐가 되레 그 목적을 훼손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럴 바엔 그 수단을 바꾸자는 것이 화폐종말론자 혹은 대안화폐론자들의 생각이다. 마침 그 새로운 수단을 실어나를 네트워크의 무한한 진화가 거듭되고 있다. 예견되는 4차산업혁명도 절호의 기회다. 그래서 이들은 지금 용기백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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