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시선으로 본 제4차산업혁명-‘효용보다 효율’(8-1)

박경만 교수(한서대학교 문예창작학부).
박경만 교수(한서대학교 문예창작학부).

 

‘들인 노력과 얻은 결과의 비율’, 그리고 ‘인간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는 재화의 효능’-. 전자는 ‘효율’(效率, efficiency), 후자는 ‘효용’(效用, utility)에 관한 사전적 풀이다. 효율과 효용은 때로 극단적이라고 할 만큼 정반대의 경제, 사회적 독사(doxa)로 작용하곤 한다. 거칠게 표현해서 효용은 ‘인간’이 수단이라면, 효율은 목적이 곧 인간이다. 현실의 체험에 접목해보면 더욱 다양한 해석도 가능하다. 효용은 목표 달성을 위해 차별과 차이를 무한 긍정하고, 생산성과 공학적 효율성 자체가 목적이다. 그러나 효율은 최적의 균형, 즉 인간과 자연의 최적화에 비중이 실린다. 그 중 어느 것이 미래사회의 핵심 알고리즘이 되느냐에 따라 우리 세상은 극과 극의 모습으로 달라질 것이다. 

그 둘의 방식은 삶의 태도에서도 확연히 구분된다. 효용은 합리화, 발전, 근면, 풍요 등 신화화된 언어, 곧 경험해보지 못한 ‘경험’에 대한 숭배로 이어진다. 반면에 효율은 이미 겪어보고 체득한 삶의 부면에 대한 ‘체험’을 재인식하는데 의미가 있다. 효용과는 다른 탈신화의 새로운 휴머니즘을 창출한다고나 할까. 효용이 지배하는 기술자본주의는 기술 엘리뜨 위주의 한계생산비 제로의 최대 생산성을 추구한다. 그 결과는 소수의 거대한 승자와 엄청나게 많은 패자로 나타난다. 사회 전체로 보아 물질적 생산성에 있어선 최대의 효용이 구가될지 모르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통체적 효율은 미미하다. 21세기 디지털 자본주의를 자칫 기술봉건주의(technofeudalism)의 나락에 빠뜨리는 격이다.

AI, 사물인터넷, 합성생물학 등과 같은 지능형 기술은 당연히 인간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도 효율과 효용에 대한 분별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그로 인한 이익을 생성하고 분배하는 방법이야말로 효용 아닌 효율적이어야 한다. 최적의 분배가 이뤄져야 하고,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여가 등이 보장되어야 한다. 니콜라 콜린 등이 인용한 ‘유연안전성’도 이에 적합한 사례다. 이미 덴마크, 네덜란드에서 보듯, 이는 보편적 만유 복지의 묘수로 선택되고 있다. 유연하되 안전한 경제, 사회적 엔진이 작동하면서, 일하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도 복지 우산을 쓰고 실업을 겁내지 않는다. 대신 기업은 채용과 해고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노동자는 일자리와 상관없이 먹고 살 걱정 덜하고, 기업가도 유연한 경영을 구사하는 것이다. 

공동체 차원의 거시적 미션 또한 마찬가지다. 당장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을 원한다면 광물에 기초한 셰일가스가 대안이 될 것이다. 그러나 후손을 위해 기후변화를 완화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탄소배출 감소를 위한 대담한 목표를 설정하고, 풍력과 태양광, 바이오연료, 그리고 기간시설을 유지하는 더 효율적인 방법 등을 고안해야 할 것이다. 여론과 사회적 인식의 지형 역시 그러해야 한다. SNS나 디지털 미디어의 효용만을 극대화할 경우 개인은 과잉 노출된 한편, 고립되고 단절된다. 반면에 한 사람 한 사람이 여론시장의 책임있는 주체로 참여할 때 사회적 소통의 효율은 극대화된다.

효용과 효율의 대립적 구분은 물론 이의에 직면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사회적 통합과 경제적 화합을 통한 최적의 사회적 효율을 강조하는 도구로서 이는 유용하다.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긴밀한 애착, 공동선의 구현과도 맞닿는다. 그런 분별이 없으면 물질 총량의 극대화를 이룬 생산체로서 효용은 높을지 모르나, 자칫 행복 총량으로 본 사회적 효율은 최악으로 치닫기 십상이다. 하긴 디지털경제 전성기를 앞둔 사회 일각에선 두 가지 모두 같은 원인과 결과의 작동 원리인양 혼용, 오인되는 경우가 많다. 필자가 이를 뒷받침하는 좀더 정밀한 비교와 해석을 이어가고자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다시 말하건대, 효율과 효용은 상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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