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시선으로 본 제4차산업혁명-‘효용보다 효율’(8-5)

박경만 교수(한서대학교 문예창작학부).
박경만 교수(한서대학교 문예창작학부).

‘경제’(經濟)란 무엇인가. 그 사전적 정의는 ‘인간 생활에 필요한 재화나 용역을 생산ㆍ분배ㆍ소비하는 모든 활동, 또는 그것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사회적 관계’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재화, 용역은 술어에 불과할 뿐, ‘인간’과 그에 의한 ‘사회적 관계’가 ‘경제’의 주어다. 재화 소비로부터 얻는 만족의 극대화보다는, 인간 사이에 싹트는 신뢰적 관계로부터 얻는 행복감이 동력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를 의역하자면, 전자는 ‘효용’에 집착하는 전술적 행위인데 반해, 후자는 삶의 ‘효율’을 기하고자 하는 경제 본연의 행위다.

이는 태고적 인류 문명의 어록에서도 반복되었다. 플라톤은 ‘로고스’는 혼자만의 이성이 아니라, 대화와 논쟁을 할 수 있는 사람들 간의 공통의 이성이라고 했다. 즉 함께 사유하고 탐구하는 ‘타인’들의 존재를 함축한 것이다. 그런 목소리는 효용과 단기적 득실에만 준거한 현대산업사회는 물론, 장차의 디지털문명에 대한 잠언과도 같다. 그렇다면 20세기 산업자본주의의 안면몰수식 경제원칙과는 달리, 타인과의 교류는 이제 물질의 의미를 뛰어넘어야 한다. 전문화와 분업, 교환이 단순히 물질적 쾌락 지수를 높이는 것 이상의 이성적 솔루션으로 작동해야 하는 것이다.

현대 경제학의 조상인 아담 스미스는 결코 인간이 성인군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인간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때론 관심을 기울인다고 했다. ‘나’의 내면에 있는 ‘공정한 관찰자’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신경을 쓴다고 했다. 스미스와 <국부론> 하면 흔히 재화의 생산 ․ 수급에 의한 최고의 부요(富饒)만을 추구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의 저작물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물질적 효용 만능의 본성보단, 사람들의 행동 방식, 즉 삶의 태도에 더 관심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스미스의 브랜드가 되다시피한 ‘보이지 않는 손’도 마찬가지다. 알려진 것과는 달리, <국부론>이나 <도덕감정론>에선 ‘보이지 않는 손’이란 표현이 딱 한 번씩 나온다. 그것도 우리가 이를 즐겨 인용하며 써먹었던 매뉴얼과는 다르다. 즉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린 지주들이 주민들에게 땅을 똑같이 나눠준 것처럼, 생필품도 똑같이 분배한다. 이런 식으로 지주들은 무의식 중에 부지불식 간에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고, 인류가 살아갈 수단을 제공해준다.”는 서술이 이어진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익을 주는 수단으로 ‘보이지 않는 손’이 언급된 것이다. 

특히 그의 본심이 담긴 건 <도덕감정론>이다. 그 속엔 돈벌이 위주의 삶을 변호하는 내용이 거의 없다. 없다기보단, 돈 벌이 자체가 목적인 물질적인 야심을 스미스는 매우 경멸했다. 자본주의의 원조라는 후대의 존숭(尊崇)감을 무색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대신에 그는 이런 ‘야심’이 타인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음을 인정한다. 사람들이 ‘정직한 야심’ 때문에 더 열심히 노력하고, 혁신하고, 향상시키고, 모으고, 생산하려 하고, 인간의 삶을 화려하게 꾸밀 수 있다고 생각했다.

스미스는 또 “인간의 타고난 본성, 즉 자신이 원하는 것과 교환하려는 성향에서 비롯된 협력의 힘으로 시장이 만들어진다.”고 자본주의를 유기적인 인간 관계로 이해했다. 즉, ‘교환’보다는 ‘협력’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그가 제시한 모든 최적의 생산과 분배의 아이디얼은 사실 이런 철학적 시선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이는 디지털 기술이 만개하는 시대에도 역시 통하는 이치다. 가족, 친지, 이웃과 같은 감성 공동체, 혹은 교환과 분업의 이익 공동체 속에서 ‘인간’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과도 같다. 곧 효율적 삶에 대한 고민이자, 스미스가 발견한 ‘보이지 않는 손’의 21C 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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