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ㆍ칼럼니스트.
시인ㆍ칼럼니스트.

대한불교조계종이 극심한 혼란에 휩싸여 있다. 1962년에 출범한 조계종은 한국 불교 27개 종단의 하나이며, 한국 불교 최대의 종단이다. 이번 사태는 총무원장 설정스님의 ‘친자의혹공방’으로 시작되었다. 설조 스님의 단식과 일반 승려들의 사퇴 요구를 총무원장인 설정 스님이 수용해 일단락되는 듯 했으나, 이후 설정 스님이 사퇴를 번복하면서 조계종 내부 분란은 들불처럼 번졌다.

‘친자의혹’을 둘러싼 공방도 간과할 수는 없으나, 700여년 가까운 긴 세월을 우리민족과 함께 희로애락을 함께하며 존립해 온 불교의 정신적 가치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 가눌 길 없다. 그러한 가치 이념이 곧 우리의 민족정신이라고 해도 지나치진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교계가 종교 본연의 참모습과는 달리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일 때마다, 고독한 수행의 길에 올라 오로지 정진에만 전념하며 평생을 바친 고승대덕(高僧大德)을 떠올리게 된다. 그중에서도 평생을 철두철미하게 용맹정진한 효봉 큰스님의 일화는, 작금 혼란에 빠진 불교계가 뼈를 깎는 자성의 교훈으로 되새겨야 하리라 본다. 

효봉 스님(속명·이찬형)은 1888년 5월 28일 평남 양덕에서 5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그는 한학(漢學)에 이어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했고, 평양고보를 졸업한 뒤 와세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그 뒤 조선인 최초의 판사로 임용되어 10년 동안 서울과 함흥에서 지방법원 및 고등법원 판사를 지냈다. 

그런데 판사로 지내던 어느 날, 그의 삶을 바꾼 일대 사건이 벌어진다. 일제강점기였던 그 무렵,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된 동포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뒤 그는 3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고뇌한다.

‘인간이 인간을 벌할 수 있는가. 범부(凡夫)인 내가 무슨 권리로 사람을 죽게 만들 수 있나.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인간의 길인가.’  수많은 동포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을 던졌다. 그러나 그는 조선인이면서도 독립운동의 동참자가 아닌 동포의 심판자였다. 일제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독립투사들의 단죄를 조선인인 그에게 맡겼다. 그는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했지만, 독립투사는 동포를 위해 목숨을 던졌다. 어느 순간 독립투사의 의연한 모습이 그의 영혼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방황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마침내 ‘법복은 출세와 영광의 상징이 아니라 양심을 옥죄는 번뇌의 쇠 그물’이라는 결론을 얻기에 이른다. 며칠 동안의 고민 끝에 그는 판사직을 버린 채 가출했다.

‘이 세상은 내가 살 곳이 아니다. 내가 갈 길은 따로 있을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미련 없이 집을 떠나 유랑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입고 나온 옷을 팔아 엿판 하나를 산 뒤 3년 동안 엿장수로 팔도강산을 떠돌았다. 고난은 스스로 선택한 참회의 길이었다.

정처 없이 떠돌던 그는 금강산 신계사에서 석두(石頭) 스님을 만나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했다. 그때 나이가 서른여덟. 다른 스님들에 비해 많은 나이였다. 때문에 더욱 수련과 정진에 힘을 다해야 했다. 이 때문에 ‘절구통 수좌’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밤에도 눕지 않고 앉은 채 수행했으며, 한 번 앉으면 절구통처럼 움직일 줄 모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하지만 출가 후 5년이 지나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그는 ‘깨닫기 전에는 죽어도 나오지 않겠다’는 각오를 한 뒤 출입문이 없는 토굴을 만들어 그 속에서 1년 6개월간 정진했다. 말 그대로 목숨을 건 정진이었다. 

이후 깨달음을 얻은 뒤에는 구산 스님, 법정 스님 등 많은 후학을 길러냈다. 그중 대표적인 제자가 바로 법정 스님이다. 법정 스님의 가르침인 ‘무소유’도 효봉 스님의 절약하는 모습과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한국불교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으로 추대되며, 많은 업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민족적 양심’ 앞에서 고뇌를 거듭하며 괴로워했던 큰스님 ‘효봉’. 대한불교조계종이 극심한 내홍에 시달리는 요즘, 큰스님 효봉의 높고 넓은 자취가 더욱 그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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