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ㆍ칼럼니스트.
시인ㆍ칼럼니스트.

‘나는 갔다// 백석이 되어 찔레꽃 꺾어 들고 갔다/ 간밤에 하얀 까치가 물어다 준 신발을 신고 갔다/ 그리운 사람을 찾아가는데 길을 몰라도/ 찾아갈 수 있다는 신비한 신발을 신고 갔다// 성북동 언덕길을 지나/ 길상사 넓은 마당 느티나무 아래서/ 젊은 여인들은 날 알아채지 못하고/ 차를 마시며 부처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중략) 나는 찔레꽃을 그녀의 치마에 내려놓고 울었다/ 죽어서도 눈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손수건으로 닦지 못하고/ 울었다// 나는 말을 못했다/ 찾아오라던 그녀의 집을 죽은 뒤에 찾아와서도/ 말을 못했다/ 찔레꽃 향기처럼 속이 타 들어갔다는 말을 못했다’(이생진 ‘내가 백석이 되어’)

필자의 집에서 승용차로 20분, 서울 성북동 삼각산 남쪽 자락에 길상사(吉祥寺)가 자리 잡고 있다. 제3공화국 시절 고급요정 ‘대원각’을 운영했던 김영한(金英韓)이 대원각을 송광사에 시주해서 탄생한 절이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과거 요정을 떠올리곤 하지만, 사실 그보다도 더 강렬했던 러브스토리를 품고 있다.

김영한은 양갓집 규수로 태어났다. 그러나 가세가 기울자 16살 때 조선권번(기생학교)에서 궁중아악과 가무를 가르치던 하규일(河圭一)의 문하에 들어가 진향(眞香)이라는 기생이 됐다. 미모, 그림, 글 솜씨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는 그녀는 스승 신윤국(申允局)의 도움으로 도쿄 유학까지 떠나게 되었지만 스승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 함흥 감옥으로 찾아갔으나 스승은 만날 수 없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영어 교사인 백석과 운명적으로 만나 사랑에 빠지고 만다. 교사들 회식 장소에서 백석과 기생 진향이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다. 

진향의 미모와 총명함에 반한 그는 바로 옆자리에 앉히고 손을 꼭 잡고 속삭였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그때 백석의 나이 스물여섯이었다. 그는 퇴근하면 으레 진향의 하숙집으로 가 밤을 지새곤 했다. 그는 진향이 사들고 온 ‘당시선집(唐詩選集)’을 뒤적이다가 이백(李白)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발견하고는 그녀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그는 자야를 따라 함흥에서 서울로 올라와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렸다. 

두 사람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시대 환경은 어렵고 차가웠다. 고향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 마땅히 여겨 그를 자야에게서 떼어놓을 심사로 결혼을 시켰다. 그러나 이내 도망쳐 나와 자야 품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는 봉건적 관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야에게 만주로 같이 도피하자고 설득하지만 자야는 이를 거절했다. 결국 그는 만주로 떠나는데 그것이 그녀와의 마지막이었다. 만주를 떠돌다 북한으로 간 백석은 1960년대 초반까지 시, 아동문학, 각종 평론을 발표했으나 김일성 정권에 의해 숙청되었다. 그리고 1988년 해금되기 전까지 우리 문학사에서 잊혀지고 만다. 

백석이 만주로 떠나고 한국전쟁 이후인 1953년, 김영한은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이어서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내 사랑 백석’ 등의 책을 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평소 불교에 관심이 깊었던 김영한은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큰 감명을 받게 된다. 그리고 1987년 미국에 체류할 무렵, 설법 차 로스앤젤레스에 들른 법정스님을 만나 대원각 7천여 평(당시 시가 1천억 원)을 시주하겠으니 절로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했다. 하지만 법정스님은 줄곧 시주를 받을 수 없다고 사양하다가 1995년 마침내 청을 받아들여 법정스님의 출가본사인 송광사 말사로 조계종에 ‘대법사’를 등록한다. 1997년 길상사 창건법회 날, 김영한은 법정스님으로부터 염주 하나와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았다.

1999년 11월, 김영한이 죽기 열흘 전 기운 없이 누워 있는 노령의 여사에게 어느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천억 원을 내놓고 후회하지 않으세요?” 기자의 질문에 김영한은 짧게 답한다. “후회는 무슨, 천억 원이 그 사람 시(詩)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사랑을 간직하는 데 시 밖에 없었다는 의미였다. 김영한은 평생 절절했던 사랑을 마음속 깊이 간직한 채 ‘무소유’를 실천하고 떠났다.
 

저작권자 © 애플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