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시선으로 본 제4차산업혁명-‘특별기고-부동산 광풍을 보며’

박경만 교수(한서대학교 문예창작학부).
박경만 교수(한서대학교 문예창작학부).

최근 문화체육관광부의 설문조사에선 “우리 사회에서 삶의 가치를 성찰하게 하는 인문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람이 전체의 68%가 넘었다. 문체부는 이를 두고 “국민들 다수가 압축성장의 부작용에 대한 반성으로 인문의 가치를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현실은 과연 그럴까? 오히려 그악스럽고 탐욕에 찌든 육질적이고 반인문적인 삶이 이 땅과 우리 시대를 지배한다고 해야 옳다. 최근의 ‘미친 집값’과 이를 둘러싼 정치․사회적 갈등을 보면, 그런 설문조사마저 한낱 사치스런 위선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래서다. 4차산업혁명 운운하는 지금, 1, 2차산업혁명기 헨리 조지의 부활을 우린 목도하고 있다.

조지는 “왜 만인의 것(토지)을 특정인이 독점하는가”란 원초적 질문에서부터 사유를 시작한다. 애초 조물주에 의해 딱 그만큼의 한정지어진게 토지이며 부동산 아니던가. 토지는 반드시 공유되어야 하고, 모든 지대를 조세로 징수하여 사회복지 등의 지출에 충당해야 한다는게 그의 생각이다. 이른바 단일토지세다. 요즘 말로 하면 부동산과 그로부터 연유된 임대수익이나 시세차익, 양도소득 따위가 그 대상이다. 현대 이익사회의 ‘눈’으로 그 타당함을 놓고 벌이는 왈가왈부를 언급하고 싶진 않다. 다만 헨리 조지, 그는 인간의 진정한 ‘존재’와 존재양식을 치열하게 고심한 선구자임엔 분명하다.

지금 우린 존재보단 소유에 목을 매는, 문명의 언어로 씌어진 야만의 세상에 살고 있다. 인간으로서 삶의 본질을 추구하기보단, 그 수단으로서 약탈적 점유와 쾌락을 추구하는데 급급한 모습이다. 하긴 사유(private)재산의 본딧말이 라틴어 ‘privare’(빼앗다)에서 왔다고 했던가. 타인이 사용하거나 즐길 권리를 빼앗는 것이란 뜻이다. 디지털혁명의 문턱에 들어선 지금, 그런 병적 징후는 더욱 짙어지고 있다. 소수가 과도한 보수를 받는 멱 법칙 또는 파레토 곡선이 적나라하게 광폭의 그물을 펼치고 있다. 부동산은 그 대표적인 징후다. 한정된 재화에 대한 무한하고 탐욕스런 수요로 인해 그 가치가 천정부지로 뛰는 네트워크 효과와 승자독식의 시그니처다.

그렇잖아도 디지털화와 네트워크화에 의한 디지털혁명이 만들어낼, ‘슈퍼스타 경제학’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슈퍼스타’는 제품이나 프로세스를 가장 먼저 매력적으로 디지털화하고, 네트워크를 작동시켜 억만금의 소득을 취한다. 반면에 2등이나 후발 주자들은 실속없이 허겁지겁 그 뒤를 좇을 뿐이고, 99%의 사람들은 평균 이하 소득에 그친다. 지금의 한국형 부동산 광풍이야말로 그 리얼한 전조(前兆)에 다름 아니다. 물론 최근의 다양한 정치, 사회적 변수를 그 원인으로 꼽기도 하지만, 그 근원은 개개인의 존재적 성찰이 아닌 ‘타인의 삶과 권리를 빼앗고자’ 하는 공격적인 소유양식이다.
 
본래 공공의 재화인 토지는 공평무사하게 사용되고, 그 부가가치 또한 공정하게 향유되는게 이상적이다. 데이비드 리카도 역시 그의 <지대론>에서 그런 현실을 꿈꾸었다. 그러면서 인구증가나 기술 발전의 열매가 토지의 독점적 소유자에게 흡수되고, 빈부 격차가 커지며 지대가 상승하고 임금은 하락한다고 탄식했다. 그래서 헨리 조지가 다시 주목받는다. 그는 <진보와 빈곤>에서 아예 그런 이상을 실현키 위한 구체적인 처방을 내놓는다. 그의 단일토지세는 한 나라의 전체 재정지출을 충당할 만큼 거대하므로, 다른 세금은 없애도 된다고 했다. 그러면 토지 가치와 지대 상승분, 그리고 잉여생산량이 임금에 충실하게 반영되고, 복지가 충만해진다는 논리다.

사실 선사시대 이래 인류사를 통털어 보면, 절대적인 사적 소유권은 결코 보편적인 가치가 아니다. 독점적 부를 삶의 목표로 삼은 근대 이후 인류사를 제외하면, 이는 통례라기보단 예외에 속한다. 21세기에 펼쳐질 공유경제의 진정한 ‘공유’를 위해서도 이제 그런 예외에 쐐기를 박아야 한다. 다만 개체로서 ‘한 인간들’의 선한 의지에 의존해선 불가능하다. 당장 목전의 부동산 광풍만 해도 그렇다. “남이사 죽든 말든,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약탈적 인간 본능을 믿어선 안 된다. 최근 나온 정책 당국의 소심한 대책마저 ‘세금폭탄’이라며 날을 세우는 모리배들은 더욱 그러하다.

이제 이 시대가 절실히 요구하는 공시태(共時態)적인 ‘삶공통체’적 가치와 그 구현 수단에 공동체가 합의해야 한다. 그것이 토지공개념든, 단일토지세든, 혹은 또 다른 그 무엇이 될지는 모른다. 다만 에릭 프롬의 말마따나 무한성장에 취한 ‘미소짓는 파시즘’에 농락당해선 안 된다. 앞서 문체부 설문조사에서 사람들 대다수는 ‘인간 본연의 문제를 다루며 삶의 가치와 의미를 성찰하므로’ 인문정신이 중요하다고 했다. 정말 그럴까. 그 진정성이 입증되려면, 물질 아닌 정신적 만족이 삶의 동기가 되어야 하고, 그런 사회 풍조에 모두가 동의해야 한다. 삭막한 공학적 세계관이 지배할 4차산업혁명의 문턱에서 새삼 헨리 조지를 소환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에게서 21세기 인문정신의 한 갈래를 발굴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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