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리 기자] 기록적인 폭염만큼 올 여름 전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것은 ‘BMW’ 화재였다. 도로에서 BMW를 마주치기라도 하면 자칫 화재로 불길이라도 번질까 다른 차량 운전자들은 멀찌감치 비껴가기 십상이다. 세계적 명차의 위용을 뽐내며 국내에서 큰 인기를 자랑하던 BMW 차량이 졸지에 ‘접근 금지’ 신세가 된 것이다. 
올 상반기(1~6월) BMW 차량 화재 건수는 58건에 달한다. 비싼 돈을 주고 산 수입 고급 세단,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팔린 모델인 520d에 화재가 집중되며 BMW의 브랜드 가치는 하릴없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520d 화재는 2015년부터 간헐적으로 일어났지만 BMW코리아는 그 동안 정확한 설명이나 적극적인 대책을 세우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급기야 금년 들어서 화재사고가 빈발하고 사회문제로 번지면서 김효준 BMW코리아 회장은 뒤늦게 자발적 리콜과 대국민 사과를 했지만 늑장 대응이라는 거센 비판을 받았다.
BMW측은 차량 화재 원인으로 EGR(배기가스 재순환장치) 부품에 결함이 있었다며 10만6000여 대에 대한 리콜 계획을 밝혔다. 그나마 올해 들어서만 이미 20여 대가 화재를 겪고난 다음이어서 사후약방문이란 비판을 들어야 했다. 문제가 된 EGR 부품이 탑재되지 않은 가솔린 차량에서도 화재가 발생하고 차량마저 전소되면서 긴급 안전진단에 대한 불신이 가중되었다. 리콜조치 역시 제대로 된 원인 규명 없는 ‘땜질’이란 지적도 나왔다.
이처럼 미온적인 BMW의 대처와 소비자의 안전을 위협하는 사고가 잇따라 발생하면서 소비자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와 집단소송제를 강화, 도입해야 한다는 요구가 거세졌다. 제조사의 고의적 과실에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물리는 외국과 달리 국내에는 강력한 처벌 근거가 없어 이를 보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컸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가해자가 고의적·악의적·반사회적 의도를 가지고 불법행위를 한 경우 실제 손해액을 넘어서 징벌을 가할 목적으로 부과하는 것이다. 집단소송제는 일부 피해자가 가해자를 상대로 소송해 승소하면 그 효력이 별도의 판결 없이도 다른 피해자들에게 적용되는 제도다. 개별 소송으로 인한 비용과 노력을 아낄 수 있고 소송가액이 작아 소송을 포기하는 소액 피해자들에게도 재판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미국과 유럽 일부 국가에서는 집단소송제를 전면적으로 시행하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관련 법안이 발의됐으나 진전되지 못하고 주식시장에서만 제한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 때문에 BMW 차량 피해자들도 집단소송을 제기했음에도 불구하고, 현행법상으로는 충분한 보상과 징벌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란 시각이 지배적이다.
2년 전 폭스바겐은 미국에서 연비조작 사건으로 소비자 피해 배상에만 147억 달러, 우리 돈으로 17조 원이 넘는 돈을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겨우 과징금 141억 원에 1인당 100만 상당의 바우처(일종의 쿠폰)만을 지급하는데 그쳤다. 징벌적 손해배상과 집단소송제가 완비된 미국과 그렇지 못한 우리나라의 차이다. 
하긴 지난달 정부는 ‘자동차 리콜 대응체계 혁신 방안’을 발표했다. 자동차 제조사가 결함을 은폐·축소하거나 고의적으로 리콜 조치를 늦춘 사실이 드러나면 매출액의 3%를 과징금으로 물리기로 했다. 제작 결함으로 인해 소비자에게 중대한 피해가 발생하면 현재 3배에 불과한 배상 한도를 5~10배로 대폭 높이는 내용도 들어있다. 제작사의 책임을 무겁게 해 부당한 행위를 예방하고 소비자의 권익을 보호하는데 초점을 맞춘다는 취지다. 그러나 여론은 여전히 회의적이다. ‘합리적 수준’이란 명분으로 수위를 조절하다보니 ‘무늬’만의 혁신 방안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일각에서는 집단소송제가 도입되면 소송이 남용되고 기업의 평판을 떨어뜨려 기업 활동이 위축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지나친 우려다. 기업의 이미지만을 떨어뜨리기 위해 굳이 거액의 비용을 부담하면서 집단 소송을 할 소비자들은 없을 것이다. 다만 제도 도입 자체에만 의미를 둘 건 아니다. 실제 소비자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정교하게 설계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업계가 우려하는 소송의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도 마련돼야 할 것이다.
거대 기업 앞에 개인의 힘은 상대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다. 기업이 힘없는 다수 소비자를 보호하는 것은 사회적 책임을 이행하며 사회 갈등을 해소하고 함께 성장해 나갈 수 있는 길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나 집단소송제는 그런 점에서 사회적, 산업적 정당성을 갖는다. ‘BMW’ 사태 역시 헌법 119조 ‘경제정의’를 들춰보게 한다.

이해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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