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드 기준가 산정에 중노동…견디다 못해 정부청사 앞 ‘피켓시위’ 나서
“종가 접수 16시 의무화해야” 하소연, 과도한 업무로 매년 ‘10명 중 3명’ 이직

“매일 야근을 하고 금요일은 특히 더 긴 시간 야근을 합니다. 남들은 워라밸이니, 저녁이 있는 삶이니 하지만 편안한 저녁 시간을 보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30일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후문 앞에선 마스크를 쓴채 특별히 눈길을 끄는 피켓 시위 장면이 펼쳐졌다. 이들은 펀드 기준가를 산정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펀드업계 ‘일반사무관리회사’ 직원들이다.
이들에겐 ‘주52시간 근무제’,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저녁이 있는 삶’ 등 지난해부터 꾸준히 유행하고 있는 이 단어들은 딴 나라 이야기다. 화이트컬러 직업임에도, 그야말로 살인적이라고 할 만큼 강도 높은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한 회사에 5년째 근무해온 K씨는 “설이나 추석 명절 전에는 해뜨기 전에 (기준) 가격 산정을 완료하는 것이 목표”라고 하소연할 정도다.
펀드 기준가격이란 증권사나 은행에서 펀드에 가입하거나 인출할 때 거래 기준으로 사용되는 가격이다. 일반사무관리회사는 채권과 주식 등 펀드에 편입되는 자산의 종가(거래일 마지막에 체결된 가격)를 취합하고 이를 다시 일정한 계산식에 대입해 기준가를 산정한다. 증시가 3시 30분에 마감되면, 전국 판매사에서 정보를 취합해 운용사에 넘겨준다. 운용사에서 이를 넘겨받아 오후 7시쯤 기준가 계산을 시작하면 자정이 돼서야 겨우 끝낸다. 자산운용사의 자료 수신이 늦어지거나 오류가 발생하면 밤을 새는 경우가 보통이다.
이날 시위 피켓에 씌어있는 것처럼 “제발 기준가 산정 제도를 바꿔달라”는게 이들의 외침이다. 견디다못해 이들은 금융위원장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내며 정부청사 앞에서 시위까지 벌인 것이다. 그럼 대체 이들은 왜 이렇게 화이트컬러 중에선 보기 드문 중노동을 감수해야 할까. 이는 현행 펀드시장의 오랜 관행과 그릇된 매뉴얼 탓이다.

국내 펀드시장의 규모는 600조원에 달하며, 일반사무관리회사는 신한아이타스, 하나펀드서비스, 미래에셋펀드서비스 등 8곳이 있다. 금투협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이들 회사는 오후 7시까지 체결된 거래까지만 당일 기준가격 산정 때 반영하도록 되어 있지만, 법적 구속력이 없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오후 8시 이후 중국, 홍콩시장 등에서 진행된 거래 내역을 일반사무관리회사에 전달하는 일이 빈번하다. 그렇게 되면 기준가가 밤 12시 이후 산정되고, 다음날 새벽 자산운용사에 전달되면 운용사나 수탁은행이 기준가를 사전에 검증하는 것도 무리다.
업계 자료(대형사 4곳 취합)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일반사무관리회사의 기준가 산정 평균 종료시간은 밤 11시34분이다. 밤 12시 이후 끝난 날도 76.5일에 달했다. 하나펀드서비스의 평균 종료시간은 다음날 새벽 1시로 가장 늦었고, 밤 12시 이후 종료일도 126일로 가장 많았다. 이틀에 하루 꼴로 12시가 넘어 퇴근한 셈이다. 신한아이타스는 2017년 직원 한 명이 하루 평균 3.6시간의 시간외 근무를 했다. 이러한 과도한 업무 강도 탓에 2016년 한 해 기준가격산정 담당직원의 퇴사율은 34%에 달했다. 1년을 버티지 못하고 회사를 떠나는 신입직원도 3명 중 1명이다.
외국에서는 정해진 기준을 적용해 기준가격을 안정적이고 정확하게 산정하는 것이 투자자를 위한 것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빠르게 최신의 정보를 반영하는 것이 투자자를 위한 것이라는 의견이다. 검증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고 숙련된 전문 인력들이 강도 높은 업무강도로 피로가 쌓이면서 펀드 기준가의 오류도 급증하고 있다. 2016년까지 200건 내외였던 오류 건수가 2017년 700건이 넘었다.
종사자들은 그동안 꾸준히 금투협 가이드라인의 불합리성에 대해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금투협의 모 간부는 “일반사무관리회사들은 업계 갑을병정 중 ‘정’에 해당한다”고 말할 정도다.

전 세계에서 펀드 기준가를 당일 저녁에 계산하는 곳은 한국이 유일하다. 펀드일반사무관리노동자협의회는 그래서 ‘사람답게 살고 싶다!’라는 성명을 내놓으며 피켓을 들고 거리에 나선 것이다.
이날 피켓 시위에 나선 펀드사무직 A씨는 “우리나라의 실태는 ‘글로벌 스탠다드(Global Standard)’에 미치지 못하므로, 외국 사례를 참고하여 시급히 개선해야 할 것”이라면서 “기준시를 ‘16시 기준’으로 정하고 이후의 것은 익영업일에 처리하도록 하는 한편 구속력을 부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종가 접수 시간을 16시로 정하면 기준가 산정도 18시30분에 완료해, 공시 전에 운용사가 검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와 같은 시간대인 일본의 경우, 국내 자산은 증권시장 종료 후(15시) 당일종가로 평가해 18시까지 기준산정을 완료한다. 해외자산은 시차와 관계없이 모두 당일 운용내역을 익일에 평가한다. 기준가격 종료시점은 자산운용사가 자율적으로 결정하며 통상 당일 18시에 종료해 국내자산은 T+1일, 해외자산은 T+2일 오전 7시에 공시한다.
미국의 경우 미국 투자회사법 22C-1항에 따라 기준가격 산정 시작시간인 오후 4시 전에 주문을 신청한 투자자는 그날의 기준가격을 받으며, 기준가격 산정 시작 시간 이후에 주문을 제출한 투자자는 다음날 기준가격을 받는다. 
협의회는 “이러한 제도 개선이 일자리 창출로도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16시 기준으로 제도가 변경되어도 1명이 하루 평균 10~12시간 동안 근무해야 하지만, 8시간 근무 기준을 적용해서 계산하면 약 25~50%의 추가 채용 여력이 생긴다고 설명했다. 금융위와 금융업계가 이들의 이런 절박한 목소리에 얼마나 귀를 기울일지 두고 볼 일이다.

글 ․ 사진 이해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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