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ㆍ칼럼니스트.
시인ㆍ칼럼니스트.

조선시대 서민들이, 종로 대로에서 말을 타고 활보하는 지체 높은 양반들을 피해 다니던 길이란 뜻의 ‘피마(避馬)’에서 유래한 뒷골목이 ‘피맛길’이다. 예부터 사람 냄새가 켜켜이 배어 있던 이 길은 종로를 종로답게 만든 가장 낭만적인 골목이었다. 양반과 평민의 계급 구별이 엄격했던 조선시대 서민들은 양반이 탄 말이 지나갈 때마다 땅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종로를 다닐 때마다 매번 그렇게 머리를 조아려 시간을 허비해야 했던 서민들은 결국 큰길 옆에 말 한 마리가 겨우 다닐 수 있는 좁은 골목을 만들어 이용했다. 그 길을 따라 형성된 맛집 촌이 이른바 피맛골인데,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저렴한 가격의 선술집·국밥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식도락가들의 발길이 잦았다.

피맛골에서 이어지는 종로구청길, 청진동길에도 낙짓집, 해장국집이 즐비했다. 어둑해질 무렵 종로 피맛골은 직장인들이 빈대떡 안주에 막걸리 한 사발 마시러 들렀던 서울의 전통 먹자골목으로 서민적인 메뉴들이 총집합한 곳이었다. 나도 서울 생활을 시작한 80년대 초반부터 직장 근처에 있던 이 골목을 자주 드나들었다. 한편 이곳은 이상, 윤동주 문학의 모태이기도 했는데, 최근 몇 년 전까지도 국내 문화예술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한 시대의 살아있는 문화지도였다.

피맛골의 명물은 카페 ‘시인통신’이었다. 시인통신은 1980년 교보문고 뒷골목 2평짜리에서 시작됐었다. 당시엔 전화가 흔치 않은 때라서 전화 한 대 놓고 문인들이 말 그대로 통신을 위해 만든 곳이었다. 때문에 그곳은 누구나 직접 커피를 타 마시고 약간의 실비를 놓고 가곤 했던 곳이다.

탁자 두 개에 의자 예닐곱! 그것이 전부였고 벽은 온통 낙서로 가득했는데 낙서가 아니라 시와 서예로 써내려 간 작품(?)이었다. 그곳은 날마다 장안의 시인, 묵객, 소설가, 문학평론가, 화가 등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시대의 화두를 앞세운 채 토론의 장을 열고 열변을 토해 내곤 했다. 2층 허름한 공간에선 기타를 치며 노래도 부를 수 있어 낭만파 샐러리맨들에게도 인기 만점의 쉼터였다.

한국전쟁 직후에 문을 연 ‘열차집’에선 돼지기름에 지진 녹두 빈대떡과 시원한 조개탕이 인기 메뉴였다. 건너편의 ‘아바이순대’도 피맛골의 터줏대감이었는데 순대와 각종 전에 서비스로 술국이 나오는 ‘혼합 안주집’이었다. 삼치구이와 굴비구이로 일대를 평정했던 대림식당과 45년 경력의 고갈비(고등어구이)로 유명했던 함흥집에서 풍기던 고소한 생선 내음은 피맛골의 상징이었다. 이 외에도 1945년 광복과 더불어 문을 연 빈대떡 막걸리집인 ‘청일집’, 불고기와 오징어볶음으로 유명했던 ‘청진식당’, 소박하고 저렴한 상차림의 ‘남도식당’, 양곱창구이를 가장 맛있게 하던 ‘대성양곱창’도 빼놓을 수 없는 피맛골의 유명 음식점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초 도심재개발지역으로 지정된 뒤, 2003년 서울특별시 건축위원회에서 재개발을 허가함에 따라 청진동 166번지 일대부터 철거공사가 시작되었다. 현재 서울 종로 교보빌딩 뒤 피맛골은 을씨년스럽다. 그 많던 맛집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골목과 골목 사이에 숨어있던 작은 주막들은 버려지듯이 내팽개쳐졌다. 이들 선술집은 철거공사가 한창인 도심 속에서 외로운 섬이 됐다. 서너 사람이 앉으면 꽉 차는 쪽방 카페에서, 기타 치며 목 놓아 노래 부르던 가객도 더는 보이지 않는다. 다들 어디로 갔을까.

피맛골, 그 집들마저 모두 사라지고 나면, 그들은 이제 어디로 가서 목을 축일까.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들어 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알을 넣어주는 바람뿐// 아, 정말 / 어디로 숨어야/ 내 자신을 온전히 숨길 수 있을까’(황지우 ‘뼈아픈 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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