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ㆍ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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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라의 음료수에는 그 나라의 속일 수 없는 문명의 비밀이 숨어 있는 것 같다. 빨갛고 투명한 포도주에는 프랑스의 명석한 지성이 있고, 베르사유 궁의 분수와 같은 맑은 사치가 있다. 그리고 맥주에는 독일 국민의 낭만과 거품처럼 일다 꺼져버리는 그 관념이 있다. 떫은 ‘홍차’에는 영국의 현실주의가, 엽차의 신비한 향미에는 오리엔트의 꿈이 서로 대조적인 맛을 풍기고 있다. 마찬가지로 ‘숭늉’에는 한국의 맛이 있다고들 한다.’ - 이어령 에세이집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 음료 문화론(1962)’ 중에서
 
프랑스에 유학 중이던 어느 한국인 신혼부부가 밤늦은 시간에 사소한 말다툼을 벌이다 급기야는 고성이 오가고 말았다. 참다못한 이웃 주민이 신고를 했고 경찰이 출동했다. 갑작스런 현관 벨소리에 싸움을 멈춘 부부는 현관문을 연 뒤 깜짝 놀라고 말았다. 현관에 들어선 경찰은 꾸짖음 대신 와인 한 병과 장미 한 송이를 젊은 부부에게 건넨 뒤 씽긋 웃어 보이며 이런 말을 남기고 갔다고 한다.
 
“서로 의견 충돌이 있으셨던 모양이군요. 이 와인을 천천히 마시면서 화해하세요.”
몇 해 전 내가 어느 모임에서 들은 이야기다. 그 상황을 직접 본 것이 아니므로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아니면 내용이 다소 과장된 느낌이 들었다 하더라도, 귀가하는 내내 가슴에 스민 훈훈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프랑스산 와인을 돋보이게 하려고, 아니면 프랑스 경찰의 이미지를 좋게 보이게 하려고 만든 이야기건 간에 그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중요한 의미는, 대수롭지 않은 와인 한 잔이 부부 사이의 냉랭한 분위기를 따뜻하게 감싸주는 촉매제 역할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술이라는 것이, 정도가 지나치면 여러 가지 폐해를 안기지만, 적당히 즐긴다면 평소 서먹서먹했던 사이를 가깝게 이어주는 적절한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술의 순기능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아닌가 싶다.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보졸레(Beaujolais)에서는 매년 11월 셋째 주 목요일에 ‘보졸레 누보 축제’가 열린다. 여기서 ‘보졸레’는 포도의 생산지, ‘누보(Nouveau)’는 영어로 ‘new’라는 뜻이다. ‘보졸레 누보’는 보졸레 지방에서 해마다 9월에 수확한 포도를 저장했다가 두 달쯤 숙성시킨 뒤, 11월 셋째 주 목요일부터 출시하는 와인(포도주)의 상품명이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이 와인의 원료는 이 지역에서 재배하는 포도인 ’가메(Gamey)’로, 온화하고 따뜻한 기후와 화강암·석회질 등으로 이루어진 토양으로 인해 약간의 산성을 띠면서도 과일향이 풍부하다고 되어 있다. 이 지역은 구릉지역으로 삼림이 우거지고 자연이 아름답기로 프랑스에서도 손꼽힌다고 한다.
 
‘보졸레 누보 축제’가 처음 열린 것은 1951년 11월 13일인데 이후부터 프랑스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1970년대부터는 세계적인 와인축제로 자리 잡았다. 이 축제는 2차 세계대전 무렵 독일군이 프랑스 전역에서 쓸 만한 와인은 모두 징발하여 간 탓에, 수확한 포도에 즉시 탄소를 넣고 빨리 발효시킨 뒤 마시기 시작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해마다 전 세계적으로 약 6천만 병이 팔려 나간다는 ‘보졸레 누보’. 오늘날 이 와인이 그토록 유명해진 것은 그 지방의 적극적인 마케팅 덕분이라고 한다. 매년 11월 셋째 주 목요일 자정을 기해 출하와 동시에 축제가 열리는데 정확히 프랑스 현지 시간 0시를 기준으로 마개를 따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시차 관계상 프랑스인들보다 8시간 빨리 맛보게 되는 행운(?)이 주어진다. 장시간에 걸친 배럴 숙성 과정이 없어 깊은 맛이 나는 와인은 아니지만 ‘보졸레 누보’는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다. 무엇보다 향이 화려하고, 상큼하고 신선한 맛이 나기 때문에 가볍게 즐기기에 좋다.
 
만추의 깊은 정취가 가득한 계절. 평소 서먹서먹했거나 소식이 뜸했던 친구가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전화를 걸자. 그런 뒤, 늦가을 저녁 아늑한 카페에서 만나 ‘보졸레 누보’가 든 유리잔을 정겹게 부딪쳐 봄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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