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ㆍ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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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에 개봉된 영화 ‘링컨(Lincoln)’은 미국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의 생애 마지막 4개월을 압축적으로 그리고 있다. 중요한 것은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 영화에서 그리고자한 링컨의 모습이다. 서거 4개월 전은 남북전쟁과 노예제도 폐지를 위한 가장 복잡한 싸움에 놓인 시기였으므로 링컨의 다양한 모습을 입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바로 링컨이 보여준 ‘느림의 미학’이다. 남북전쟁이 종결돼 노예제도 폐지가 무효화될 순간에도 ‘느림의 정치’는 빛을 발한다. 공화당 내 경쟁자이자 조력자인 윌리엄 슈어드가 "평화대표단을 워싱턴에 초대하다니 제정신이냐, 이제 노예제도폐지는 무효화될 것이다. 노예제도 폐지와 남북과의 평화, 둘 다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안절부절 못하는 상황에서도 링컨은 맥베스의 구절을 인용하는 여유를 보인다. 링컨은 "시간의 씨앗을 살펴보고 어느 낟알이 자라고 안 자랄지 알 수 있다면, 그럼 내게 말하라. 시간은 훌륭하게 일을 키운다"고 느릿하게 읊어준다.
 
동화작가 이솝은 어린아이들과 장난을 치며 새로운 힘을 얻어, 지친 일상을 추스를 때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다 큰 어른이 아이들과 노닥거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솝을 보고 혀를 차며 핀잔을 주었다. 그러자 이솝은 잠자코 옆에 있던 현악기의 활을 집어든 뒤 느슨하게 풀어 그 사람 앞에 놓았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나는 지금 느슨해진 활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줄을 계속 팽팽하게 매어놓으면 활은 부러지고 말지요. 그러면 연주가 필요한 때에 제대로 된 음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꼭 악기의 활을 느슨하게 해두는 시간을 가집니다. 당신이 보기에 제가 느림보, 바보 같겠지만 지금은 더 나은 다음 연주를 위해서 잠시 줄을 느슨하게 풀어두는 시기입니다. 쉬지 못해서 악기를 부러뜨리는 진짜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들은 쉼 없이 달리거나 속도를 내는 것만이 능사라고 생각하기 쉽다. 현대인들은 긴장된 삶을 살면서 느슨하고 느리게 사는 여유를 차츰 잊어가고 있다. 
 
‘오래 엎드린 새는 반드시 높이 날고, 앞서 핀 꽃은 홀로 먼저 지느니라. 이를 알면 발 헛디딜 근심을 면하고, 조급한 마음을 덜 수 있으리라.’ 채근담에 나오는 말이다. 이는 무작정 급하게 서두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잘 나타내고 있다. 속성속패(速成速敗)라는 말도 있다. 아무렇게나 급하게 이루어진 것은 쉽게 결딴이 난다는 뜻으로 이 역시 신중치 못하고 빨리 이루려고만 하는 어리석음을 빗댄 표현이다. 급한 마음은 대체로 짧은 생각을 낳게 되고, 그런 생활 패턴으로 살다 보면 원치 않는 사고와 불행에 맞닥뜨릴 수도 있다는 얘기다.
 
간혹 이런 상상을 해 본다. 만약 자동차가 멈춤 없이 계속 달리기만 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어느 구간까지는 잘 달려가겠지만 결국은 기름이 바닥나 그만 멈춰 서 버리고 말 것이다. 달려오는 도중에 잠시 멈춰 기름을 채우지 않았으므로 이제 더 이상 달릴 수가 없다. 게다가 엔진에 무리가 가해져 그만 고장이 나고 말았다. 기름을 다시 채운다 해도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다. 한 마디로 모든 것이 끝나 버리는 극한 상황에 이르고 만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자동차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인생을 조금 더 오래 누리며 자신이 품었던 꿈을 활짝 펼치려면, 잠시 멈춰 서서 쉬어가는 여유로움도 있어야 한다. 그렇게 멈추어 쉼표를 찍은 뒤 가만히 귀 기울여 보면, 아름다운 새들의 지저귐과 너그러운 나무들의 넉넉한 대화가 귓전을 은은히 울릴 것이다. 그렇게 멈추어 쉼표를 찍은 뒤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면, 갓 태어난 아기 새의 몸짓과 영롱한 이슬을 머금고 수줍게 피는 들꽃과 너그럽게 침묵하는 여유의 숲이 반겨 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가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푸른 꿈도 보일지 모른다. 이 모든 아름다움이야말로 우리가 무작정 앞만 보고 쉼 없이 달려오느라 보고 듣지 못한 채 놓쳐 버린 소중한 것들이다.
 
프랑스의 사회철학자 피에르 쌍소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라는 책에서 “인간의 모든 불행은 고요한 방에 앉아 휴식할 줄 모르는 데서 온다”는 파스칼의 말을 인용, ‘느리게 사는 삶’을 제시했다. ‘느리게 산다는 것’. 그것은 바로, 게으름이 아니라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천천히 에둘러 가더라도 인생을 바로 보자는 의지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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