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아날로그의 향기
그리운 아날로그의 향기
  • 김부조
  • 승인 2019.12.06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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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ㆍ칼럼니스트
시인ㆍ칼럼니스트

오늘 하루쯤은 신문이 없었으면 한다/ 오늘 하루쯤은 TV를 끄려 한다/ 먼동이 틀 무렵 새벽 강가로 나가/ 갓 깨어난 강물에 머리를 감고/ 밤새 달려온 풋풋한 바람에/ 낮은 자세로 안겨/ 새들이 다투어 전하는 여명의 메시지를/ 귀담아 들으려 한다/ ․․․(중략)․․․ / 오늘 하루쯤은 느지막이 집을 나서/ 무릎이 아려 올 때까지/ 버려진 흙길을 터벅터벅 걷다가/ 붉은 노을에 몸을 흠뻑 적시며/ 느긋하게 돌아오려 한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면/ 창백한 형광램프와 화해한/ 그윽한 촛불을 밝히려 한다/ 그리고 오늘 하루쯤은 반문하려 한다/ 나는 매일 무엇을 잊고/ 또 무엇을 잃어 가는지를(자작시 ‘아날로그를 위하여’)
 
망향의 일상에서, 어떤 날은 그리운 고향의 정취가 낯익은 춤사위로 향수를 자극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이메일의 창을 닫은 다음 연필을 정갈하게 깎아, 빛바랜 편지지라도 꺼내 소식 뜸한 고향 친구에게 황토 빛 안부를 전하고 싶다. 어떤 날엔 휴대전화의 전원도 일찌감치 끄고 인터넷 접속을 쉬고 싶은 충동도 느낀다. '소리'와 '문자'의 소통이 아닌 마음에서 빚어진 침묵의 '언어'와 '이미지'를 곱게 날려 진부한 텔레파시의 존재 논란에 종지부를 찍고 싶은 것이다. 밋밋한 생수를 대신할 구수한 보리차를 끓이고, 습관성 커피를 대신할 그윽한 녹차 향도 우려내고 싶을 때가 있다. 디지털 문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울’이라는 거대한 회색빛 도시에 갇혀 사는 나는 날마다, 아날로그 세상으로의 회귀를 꿈꾸며 작은 몸부림을 치고 있다.
 
해마다 연말이 다가오면 나는 우체국에서 판매하는 연하장을 다량 구입한다. 가격도 저렴하지만 인쇄된 그림들이 전국 공모전에서 입상한 우수작이어서 구매자들로부터 높은 인기를 누린다. 주문한 연하장이 도착하면 우선 속지에 들어갈 자작시를 정하고, 여백을 고려해 세팅한 뒤 컴퓨터 프린터를 이용, 깔끔한 인쇄를 마친다. 다음엔 자작시가 인쇄된 속지를 절반으로 잘 접어 풀칠을 한 뒤 하나씩 정성들여 연하장에 붙인다. 그 작업이 모두 끝나면 연하장을 다시 한 장씩 펼친 뒤 새하얀 속지 위에 새해 인사말을 직접 써 넣는다. 속지에는 이미 우체국 자체에서 인쇄한 새해 인사말이 간략히 들어 있지만, 연하장을 받고 기뻐할 사람들의 얼굴을 차례로 떠올리며 인사말을 직접 써 넣기 시작하면 나의 입가엔 어느새 행복한 미소가 잔잔히 피어오른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에서 평소 안부를 자주 묻지 못했던 집안 어른들이나 지인들, 그리고 선후배들에게 비록 한 장의 연하장이지만 나의 마음을 정성껏 담아 보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그것도 컴퓨터 화면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이메일 연하장이 아닌, 보내는 사람의 정성과 따뜻한 체온이 스며든 아날로그 방식(?)의 연하장이므로, 나는 해마다 시간과 수고로움을 감수하면서도 이 행복한 작업을 되풀이해 오고 있다. 연하장을 발송하고 난 뒤 수신자들이 화답하는 감사 메시지의 흐뭇함 또한 어디다 비길 데가 없지만, 우선 나가 택한 아날로그 방식이 스스로를 행복감에 젖게 만든다는 그 아름다운 원리에 그저 매료되어 갈 뿐이다.
 
21세기는 디지털 시대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가 되기 이전에 우리는 분명 아날로그 시대에 살았다. 아날로그는 인간적인 여유로움, 궁극적인 행복과 인간성, 정통성, 그리고 정(情)이 있다. 우리는 오랜 세월 그 속에서 살아 왔기에 지금도 어떤 날은 휴대전화 없이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고 이메일이 아닌 손으로 쓴 편지를 받고 싶은 것이다. 때론 지나치게 빠른 스마트 세상에 멀미를 느끼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아파트가 가로막은 길과 차가 꽉 막힌 도로를 벗어나 주택가 골목을 여행하고 싶어 한다. 디지털 카메라를 즐겨 쓰던 일부 젊은이들이 수동 카메라를 들고 삼청동, 인사동, 북촌길 등 서울의 옛 정취가 물씬 배어 있는 골목길을 찾기 시작했다. 현상소에 필름을 맡기고 그것이 인화될 때까지 마음 설레며 기다린다. 전자책이 야심찬 도전장을 냈다지만 종이책과 종이신문은 아직 건재하다. 서점은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들은 직접 손으로 책장을 넘기며 종이 냄새를 맡고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아날로그의 고유한 매력을 발견한다. 아날로그 문화를 동경하는 삶이 어쩌면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현대인이면 누구나 공감하는 트렌드라고 본다. 우리 모두 한번쯤 따뜻한 아날로그의 매력이 담긴 문화생활을 설계해 보는 것도 새로운 삶의 멋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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